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
작성자 감자칩
감자칩의 겸사겸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
작가는 ‘이것은 결국 로봇의 이야기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책을 덮고 나서 ‘이것은 결국 인간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몇몇 부분에서는 인간과는 다른 모습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과 다른 부분들을 볼 때면 그럼 이것은 무엇일까, 추론하며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저는 무엇이 인간적이고 무엇이 인간적이지 않은지를 따졌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간성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한편으로는 참으로 인간다운 발상 같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밖에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지적 수준에서만 사고할 수 있는 저란 인간의 한계 같았습니다.
소설 속의 로봇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대학을 다니며 졸업을 위해 논문을 쓰고 담당 교수의 눈치를 살핍니다. 생각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고 그 얼굴을 보고 반응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들은 공장을 통해 생산되며 숫자별로 다른 모습과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겉모습과 능력의 차이로 인해 선호되거나 배제되는 모델이 있으며 직업 선택에도 제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차별이 존재합니다. 또한 그들은 인간을 숭배하고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케이는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로봇과는 다른 면모를 보입니다. 대부분의 로봇과 달리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로봇에게 치명적인 산소를 만드는 유기 생물을 통해 인간을 창조합니다. 하지만 케이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마주하게 되자 도망칩니다. 그리고 결국 그 인간을 스스로 죽이게 됩니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으로부터 벗어났고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없앴다고 합니다.
인간은 로봇에 비해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입니다. 산소 없이는 살 수 없고 데시 -10도의 온도에서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목덜미를 조금 긁거나 머리나 배를 살짝 찌르는 것만으로도 쉽게 죽고 맙니다. 하지만 인간은 정교한 모공과 보드라운 털로 덮여 있고 모터음이나 엔진 돌아가는 소리도 없고 심지어 기운 자국 하나 없이 움직입니다. 로봇은 이런 인간을 숭배합니다. 인간들은 로봇의 숭배를 받으며 살게 되지만 이렇게 자신을 숭배하는 로봇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합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창조자인 케이의 손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인간이 있었습니다. 시아라는 인간은 케이에게 접근해 케이가 믿을 수 있고 협상을 할 수 있는 로봇인지 시험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환경청 정화를 중지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아는 인간이 로봇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고 믿지 못합니다. 로봇과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침공하지 않는 협정을 맺으려 합니다. 또한 로봇에게 인간의 어떤 명령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로봇 역시 의지를 가진 생명이므로 다른 생물에게 종속된 존재일 수 없고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저 스스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합니다.
이런 인물들을 보며 인간인 저는 너무나도 인간스럽게, 그럼 무엇이, 어떤 존재가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같은 로봇임에도 숫자에 따라 차별을 하거나 기존의 관념을 깨고 자신만의 관념을 이뤄내거나 타인에게 맹목적인 지지를 받거나 모두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려 하거나 기적을 바라고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는 모습들 가운데 어떤 것이 인간을 더 잘 드러내고 가까운 모습인지 고민해 봤습니다. 하지만 명확히 답을 내리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가 저는 방금 막 마지막 장을 덮은 책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종의 기원담>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입을 막고 있는 듯한 존재의 모습이 그려진 사각형 모양의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각형 모양의 네 귀퉁이에 머릿 속에서 해결되지 않은 책 속의 인물들을 옮겨 보았습니다. 각각의 귀퉁이를 쓸어보니 책 등 부분은 제법 딱딱했지만 책 날개 부분은 그에 비해 뭉툭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습니다. 조금씩 다른 귀퉁이를 만져보고 나니 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로봇의 얼굴, 책의 가운데 부분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인 저는 책의 네 귀퉁이에 있는 인물들의 모습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한 쪽 귀퉁이에 가깝다가도 순간적으로 반대편 귀퉁이에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선하고 재미있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때로는 악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혹은 귀퉁이의 끝부분이 아니더라도 귀퉁이와 귀퉁이 사이의 어딘가에도 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사각형의 여러 지점을 옮겨 다닌 후엔 언제나 그 중심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중심으로 돌아오고 나면 이렇게 다른 모습들에 조금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몇몇 모습들에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타인을 만날 때도 이와 비슷합니다. 대화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혹은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다가도 그의 다른 쪽 귀퉁이를 마주하게 되면 이전까지의 마음이 완전히 뒤바뀌기도 합니다.
이런 사각형 안에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한쪽의 귀퉁이에만 머무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인간은 결국 모든 면과 귀퉁이를 가진 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귀퉁이를 조금은 다듬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날카로운 곳은 조금 무디게, 차가운 곳은 덜 차갑게 만드는 노력입니다. 이는 저로 인해 타인이 받는 아픔이나 상처의 크기를 아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퉁이를 다듬는 것만큼이나 타인의 모퉁이를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타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에 감탄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그에게도 어둡고 날카로운 곳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각자가 가진 네모의 크기와 모양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혹은 네모가 아닌 다른 모양의 도형을 가진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세실이 말한 기적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서로가 서로를 서로로서 인정하는 것. 소설 속에선 세실이 말한 기적이 이뤄진 것일까요? 책을 넘어 현재 저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어떨까요? 세실이 말한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다른 존재를,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책을 다 읽은 지금 세실이 말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말 기적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