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벽과 불확실한 변화,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작성자 감자칩
감자칩의 겸사겸사
단단한 벽과 불확실한 변화,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달리기, 재즈 음악, 싱글 몰트위스키. 모두 무라키미 하루키의 에세이의 소재라고 합니다. 저 역시 하루키와 같이 앞선 것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하루키의 글은 선호하지는 않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긴 분량만큼 몰입되는 부분도 있었고 늘어지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제 머릿속을 채웠던 것은 바로 모호함입니다.
나는 도시에 머물고 싶어 했고 그것을 선택합니다. 소녀와 함께 만든 도시이고 그림자가 아닌 진짜 소녀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진짜 소녀와 함께 머물기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그 도시에 갈 수 없게 됩니다. 나는 소녀 혹은 그 도시에 가기를 기다리며 세월을 보냅니다. 도서관 관장 일을 하며 자신과 소녀가 만든 도시가 단순히 둘만의 상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서브마린 소년은 그 도시에 가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소년은 사라집니다. 나는 불가능한 것을 알지만 소년이 그 도시로 갔다고 생각합니다. 나와 소녀가 상상으로 만든 그 도시에. 이후 마르케스의 글을 떠올리며 나는 그 불확실한 벽을 넘습니다. 마흔이 넘은 현재의 나이를 거슬러 열일 곱 살이 된 후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소녀의 뒤를 따라 걷고 소녀의 손을 잡을 때 나는 나의 그림자가 없음을 알아차랍니다. 소녀는 똑바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입니다. 우리는 둘 다 누군가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다고. 도시 안의 진짜 소녀가 나와 자신 모두 진짜가 아닌 그림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1부의 도시 밖의 소녀도 자신을 그림자라고 하고 2부의 도시 안의 소녀도 자신을 그림자라고 합니다. 진짜 소녀는 어디 있는 걸까요? 존재하기는 했던 것일까요? 저는 혼란스러움에 책장을 앞으로 넘겨보며 제가 놓친 부분이 있는지 살폈습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은 분량을 지나왔고 이 두꺼운 책을 다시 살피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책을 잠시 덮어 두었습니다. 그러자 책의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습니다.
도시는 나와 소녀가 함께 만든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 상상이자 도시는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벽은 내가 그림자와 함께 도시에서 도망치려 할 때 갑자기 치솟으며 말합니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고,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이 벽은 무엇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끊임없이 계속되고 결국 통과할 수 없는 것. 지나가려 해도 넘어설 수 없는 높이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삶이 아닐까요. 죽음 외엔 이 삶을 멈출 수도 넘어설 수도 없습니다. 도시의 벽은 벽돌과 벽돌 사이에 줄눈이 없습니다. 벽돌 하나하나의 모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빈틈없이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제의 나, 오늘의 나, 그리고 그 위로 쌓일 내일의 나로. 각각의 나는 저마다 다른 기분과 다른 생각과 다른 관계로 인해 다른 크기와 모양과 색깔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모양을 가진 벽돌들을 이어 붙이는 것 역시 ‘나’입니다. 각각 다른 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같은 나입니다. ‘나’는 이런 변화와 불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불확실합니다.
그림자는 도시는 구성부터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고, 이를 존속시키기 위해선 그 모순점을 해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와 소녀의 상상으로 만든 도시이기 때문에 이런 모순은 불가피합니다. 이 방법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상을 위해 불확실한 변화를 멈추는 것과 상상을 버리고 불확실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이 중 나는 결국 그 도시를 벗어나는 선택을 합니다. 구성부터 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는 도시를 스스로 떠나게 됩니다.
이러한 결말을 통해 저 역시 고민하게 됩니다. 변화하고 불확실한 인간으로서, 이전의 이상을 위해 변화를 거부하고 단단한 벽을 만들어야 할지 혹은 이전의 이상을 벗어던지고 불확실한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지. 촛불을 끈 내가 부드러운 어둠 이후 맞이할 빛은 어떤 빛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