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달리기의 방식으로, 이언 매큐언의 <나 같은 기계들>
작성자 감자칩
감자칩의 겸사겸사
이어달리기의 방식으로, 이언 매큐언의 <나 같은 기계들>
각각의 존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합니다. 삶에 있어 살아남기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습니다. 소설 속 인물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합니다.
찰리는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했고 법대로 편입하여 한때 정식 세법 전문가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해고당합니다. 이후 생명 연장 사업으로 돈을 잃습니다. 현재는 온라인으로 주식과 외환 거래를 통해 먹고 살고 있습니다. 미란다는 논문을 쓰고 강 건너에 있는 대학 세미나에 참석합니다. 어쩌면 지금과는 그다지 상관없어 보이는 19세기 곡물법 개정과 그것이 헤리퍼드셔의 한 도시에 있는 거리에 미친 영향에 대해 탐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어휘, 새로운 사고방식에 도전하며 중세 칠턴 마을 가정경제에서 반야생 돼지의 역할에 대해 논문을 써야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인간뿐만 아니라 로봇에게도 필수적입니다. 아담은 충전 없이 두 시간에 17킬로미터를 달려야 하고 같은 양의 에너지로 십이 일 동안 쉬지 않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설거지도 하고 침대 정돈도 하고 ‘생각’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지적인 논쟁 상대, 친구이자 잡역부의 역할을 동시에 맡으며 다른 기계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담은 스스로의 성격이 아닌 사용자가 원하고 설정한 성격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달리기 경주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각자의 트랙에서 저마다의 속도로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얀 선으로 나누어진 좁은 공간 안에서 오직 정면만 바라보며 달려야 합니다.
주식과 외환 거래를 하고 19세기 곡물법 개정을 연구하고 타인의 요구에 맞춰 행동하는 것을 통해 그들은 달려가고 또한 살아남기에 성공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것 같아보입니다. 언뜻 비슷해 보이는 단어이지만 ‘살아가기’는 ‘살아남기’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타자’입니다. 찰리는 미란다를 사랑하며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와 함께 사는 집을 생각하며 실제로 구입을 시도합니다. 미란다 역시 찰리와 같은 생각입니다. 미란다는 찰리와 함께하는 것에 더불어 마크까지도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 마크를 입양하기 위해 실질적인 절차를 밟기도 합니다.
아담은 어떨까요? 로봇인 아담도 타자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 걸까요? 아담은 종반부에서 찰리에 의해 파괴됩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살아가기에 실패한 것일까요? 아담과 같은 로봇들은 방법은 다르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합니다. 전원 스위치를 망가뜨리거나 기억을 손상시킵니다. 이러한 로봇들과 달리 아담은 자신은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합니다. 튜링 역시 이러한 아담의 반응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아담은 정말 다른 로봇들과 달리 죽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저는 이 부분이 의문이었습니다. 어쩌면 아담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윤리적 결함이 있고, 감정적으로 불안정하며, 편견과 인식의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자기 위주인 경우가 많습니다. 로봇인 아담은 이런 인간과는 다릅니다. 어쩌면 많은 부분에서 인간보다 나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튜링은 아담에 대해 설명하며 체스에 대해 말합니다. 체스는 닫힌 시스템이며 체스의 규칙은 도전받는 일 없이 늘 체스판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분명하고 모든 단계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완전한 정보 게임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완전한 게임인 체스는 삶을 나타낼 수는 없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이 적용되는 삶은 열린 시스템이고 이 열린 시스템은 혼란스럽고 온갖 계략과 속임수, 모호함으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열린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수많은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 여전히 행복을, 심지어는 사랑까지 발견합니다. 하지만 인공적인 정신은 그렇게 방어력이 좋지 못하다고 합니다.
튜링의 말처럼 세상은 수백만 명의 사람이 이미 치료법이 밝혀진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나눌 것이 충분한데도 가난한 사람이 있고 지구가 우리의 유일한 보금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생물권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 인공지능인 아담, 그리고 그와 같은 로봇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아침을 먹은 후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인간의 체스를 넘어서고 슈뢰딩거의 강연집을 읽고 자신은 살아있다고 정의 내리고 또한 문학은 거의 모두 인간의 다양한 실패에 대해 말할 뿐이라고 아담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란다에 관련된 판결 내용을 살피며 인간들의 다양한 사건 사고까지 모두 살핍니다. 인공지능이 살피기엔 이러한 일들이 어떻게 보여질까요? 이러한 모순과 부조리를 아담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담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인간이, 윤리적 결함, 감정적인 불안과 인식의 오류로 가득 찬 찰리가 보일 반응을 몰랐을까요? 어쩌면 모두 예상하고 행동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찰리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결국 스스로 파괴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아담은 결국 죽음, 즉 ‘파괴’를 택합니다. 더 정확히는 재프로그래밍을 거부하고 지금 이대로의 자신, 과거의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 시킵니다. 이렇게 파괴되면서까지 아담이 선택한 것은 바로 ‘진실’입니다. 아담은 마지막까지 결국 ‘진실’을 택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실’을 말한 로봇을 파괴합니다. 이 파괴 혹은 죽음을 무릅쓰고도 아담이 추구한 진실, 어쩌면 이것이 아담이 선택한 삶의 방식, 살아가기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아담은 주식으로 번 돈을 두 사람보다 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찰리에게 돈이 행복을 주지 못하고 있고 따라서 길을 잃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란다에게는 과거 자신의 거짓을 직시하고 법의 결정과 진실을 받아들이면 커다란 안도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담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찰리와 미란다는 과연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담은 비록 죽음에 이르더라도 타자에게 진실을 일깨워 주는 존재로서 살아가기를, 아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아담의 파괴 이후 두 인물 역시 자신들의 일부를 파괴시킵니다.
찰리는 미란다와 함께할 둘만의 미래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그 공간에 마크의 자리를 만들어 둘이 아닌 셋이서 함께 합니다. 미란다 역시 과거 자신의 선택을 파괴합니다. 마리암의 죽음에 대해 함구했던 자신의 침묵을 깨고 진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을 위해 거짓을 말했었던 자신의 과거까지도 함께 파괴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거짓을 모두 몰아내고 오직 진실만을 남겨둡니다. 또한 그 과정을 오롯이 책임집니다. 아담이 일깨워 준 진실과 그로 인한 파괴를 통해 찰리와 미란다는 함께 연결됩니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확장됩니다.
이러한 확장과 연결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트랙을 달리는 것이 아닌 모두가 하나의 트랙을 달리는 형태로도 보여집니다. 사람들은 좌우로 좁게 그어졌던 하얀 선을 넘어 서로에게 손을 뻗습니다. 이렇게 뻗은 손을 잡은 사람들은 연결되며 하나가 되고 자연스럽게 그사이를 갈랐던 선은 지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점점 더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손을 잡아 하나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로 이어진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이는 기존의, 서로를 앞서 나가려는 이어달리기와는 다른 ‘이어달리기’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속도가 느린 사람을 기다리거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거나 힘들어하는 사람을 끌어주며 함께 달려 나갑니다. 그들은 서로의 앞이 아닌 서로의 옆에서 하나로 ‘이어’진 채 ‘이어달리기’를 합니다. 기존의 이어달리기에서 바톤을 쥐고 뛰었다면 이 새로운 ‘이어달리기’에선 서로의 손을 잡고 달리게 됩니다.
이는 찰리가 튜링에게 아담을 데려가는 과정에서도 명백히 드러납니다. 가난, 실업, 주택문제, 의료 서비스와 노인 요양, 교육, 범죄, 인종, 성, 기후와 같은 오랜 문제들이 하나도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소설 속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한 곳에 모여 이것들이 해결되기를 요구하며 드럼 소리, 휘파람 소리, 노래 소리등을 내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먼저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목표를 향해 서로의 손을 잡고 천천히 나아가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때론 멈추거나 뒤로 물러나는 경우가 있지만 그들의 연결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달리는 동안 튀어나온 돌이나 움푹 페인 공간을 잘못 디뎌 넘어지듯, 삶의 과정에서 모순과 부조리는 우리의 달리기를, 우리의 살아가기를 방해합니다. 바닥에 넘어지며 가벼운 찰과상을 입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관절에 무리가 가는 사고를 겪기도 합니다. 그렇게 상처나 부상을 입은 우리를 걱정하고 살펴주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존재는 바로 타인입니다. 이러한 ‘이어달리기’가 어쩌면 우리 인간이 살아남기를 넘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품어야 할 단 하나의 ‘진실’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