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포,마음의 실로 엮어낸 그들 각자의 매듭법<열광금지 에바로드><성덕>

다카포,마음의 실로 엮어낸 그들 각자의 매듭법<열광금지 에바로드><성덕>

작성자 감자칩

감자칩의 겸사겸사

다카포,마음의 실로 엮어낸 그들 각자의 매듭법<열광금지 에바로드><성덕>

감자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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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포, 내면의 실로 엮어낸 그들 각자의 매듭법. 장강명의 <열광금지 에바로드> + 오세연의 <성덕>

저 역시 에반게리온을 좋아했었습니다. TV판과 극장판을 모두 챙겨 보며 ‘이걸 이렇게?’, ‘이건 왜?’, ‘제발 그만’ 같은 감탄과 의문, 실망을 반복했습니다. 종현과 마찬가지로 저도 ‘큐’까지 밖에는 보지 못했었습니다. 에반게리온의 최종판인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이하 <다카포>)’이 나온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챙겨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억을 되살려 찾아본 최종판 <다카포>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의견이 있지만 ‘어쨌든 끝났다’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만약 종현이 <다카포>를 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습니다. 영화 <성덕> 역시 인상 깊었습니다. 자신의 최애가 범죄자가 된 상황은 정말 ‘영화’ 같았습니다. 감독이자 주인공인 세연은 과거에 실제로 지금은 범죄자가 된 x를 만나기도 하고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덕질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과거를 톺아보는 세연의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종현과 세연. 두 사람 모두 어떤 존재 혹은 대상을 좋아했습니다. 종현은 에반게리온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고 외롭던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연은 홀로 남겨진 집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잊기 위해 x의 노래를 들으며 잠이 들었습니다. 그 대상을 따라 열 시간이 넘는 비행기를 타고 첫 외박을 해보기도 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혹은 실제로 만날 수 없는 존재임에도 그들은 그 대상에 가까워지려고 합니다. 이 행위들은 가슴 속에 품었던 마음을 밖으로 꺼내 그 대상을 향해 보낸 그들의 마음 같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그 대상에게 가까워지고 조금이라도 닿아있기를 바라는 이 마음은 마치 무언가에 실이나 끈으로 묶어 고정하려는 매듭 같아 보였습니다. 그 매듭을 실이나 끈이 아닌 자신의 마음으로 묶어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세상에는 수 많은 매듭법과 실이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마음의 길이와 모양, 종류는 다양할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만의 매듭을 만든 사람들은 그 대상이 작게 속삭이거나 조그만 움직임을 보여도 금세 알아차리고 반응하게 됩니다. 또한 그 거리로 인해 그 대상의 행동을 왜곡해서 인지하기도 합니다.

종현은 에반게리온이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해준다고 여기며 ‘네가 겪는 고통은 특별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자신에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외로움과 괴로움이 이 세계의 존망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특별한 일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고 합니다. 종현의 세계에는 사도도 네르프도 없지만 외로움만큼은 신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종현은 자신과 같은 외로움을 가진 신지에게, 신지가 타는 에바에게,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세계에 매료되었습니다. 자유롭고 락을 좋아하고 요리를 좋아하는 x에게 세연은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묶어둡니다. 팬미팅에 찾아가 관심을 받기 위해 한복을 입고 x를 위해 꾹꾹 눌러쓴 편지도 수십 장에 달합니다. x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x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메고 다니기도 합니다. 하지만 x의 범죄 소식이 전해집니다. 그리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합니다.

저 역시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묶어 두었습니다. 그가 속한 그룹의 앨범을 사고 음방을 챙겨보고 1위를 할 수 있도록 문자도 보냈습니다. 뮤직비디오와 안무 연습 영상을 돌려보며 그의 독보적인 비주얼과 춤선에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가창 실력과 재력, 그리고 대기업(이지만 제대로 하는 것 없이 팬들의 주머니를 털 궁리만 하는 콩가루 회사)소속인 그는 저에게 없는 것을 모두 가진 존재였습니다. 음반이 나오면 종류별로 구입하고 원하는 포토카드가 나오길 바랐습니다. 또한 집과 회사 컴퓨터로 스트리밍을 돌리며 그에게 1위 트로피를 안겨주고 싶었습니다. 그가 기부한 단체에 그가 속한 그룹의 데뷔날짜만큼의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생일엔 생일 카페를 돌고 콘서트장에선 열심히 응원봉을 흔들었습니다. 매번 같은 빛만 내며 홀로 있던 응원봉이 형형색색의 빛을 뿜으며 수많은 응원봉과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볼 때는 조금 울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논란을 처음 접하고는 저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습니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이런 논란이 시작되었는지를 찾기도 했습니다. 법을 어기거나 폭력을 휘두른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사과했습니다. 세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저의 마음은 몹시 허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가 속한 그룹에도 영향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의 첫 영화 데뷔작까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그를 향한 저의 마음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묶어둔 제 마음은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멀어졌고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상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성덕>에서 세연은 자신의 끊어진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그 끊어짐의 과정은 세연에게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누구보다 팽팽하게 x와의 매듭을 묶어둔 탓입니다. 그런 마음을 x는 예고도 없이 끊어버린 것입니다. 일순간에 끊어지며 생긴 마음의 탄성은 x가 아닌 세연을 향하게 됩니다. 어떠한 대비도 없이 그 탄성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너무나도 아픈 일입니다. 더구나 그 아픔을 준 것은 x이지만 동시에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연은 그 상처와 끊어진 자신의 마음을 살핍니다. 또한 자신과 같이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살펴보게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은 다른 대상에게 묶어 두었던, 방향을 잃은 자신의 마음을 끌어모아 옆에 있는 사람의 상처를 감싸줍니다. 영화의 끝에서 세연은 이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는 것, 마음 묶기를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합니다.

종현은 세연과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종현이 지나온 시간들을 살펴보면 종현은 에반게리온 말고는 자신의 마음을 묶어둘 존재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집을 나간 어머니와 빚을 내서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아버지,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에 열중하는 형. 가족 중에선 종현의 마음을 받아줄 존재가 없었습니다. 경희의 조금 경우가 특별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종현에게 남은 건 에반게리온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종현은 대륙과 바다를 건너 자신의 유일한 매듭인 에반게리온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종현은 일본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에반게리온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결함투성이이고, 많은 이야기가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만화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묶은 에반게리온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럼에도 종현은 스탬프 랠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과 상황, 기분을 모두 자신의 카메라에 담습니다. 스탬프 랠리를 완주한 종현을 보며 사진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종현은 부스를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다 결국 눈물을 흘립니다. 이 눈물은 어쩌면 <성덕>의 세연처럼, 종현이 자신의 마음을 묶어둔 에반게리온이 아닌, 에반게리온에 묶어둔 길고 긴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바라보게 된 순간 같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현은 에반게리온에 묶어둔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풀어낸 자신의 마음을 에반게리온이 아닌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건네게 됩니다. 아버지의 임종 소식에 눈물을 흘리고 치열하게 공부를 했던 형을 이해하고 암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며 웃게 해드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종현은 이제 에반게리온이 아닌 자신의 가족들과 매듭을 짓기로 합니다.

세연과 종현의 마음을 보며 저의 마음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전보다는 SNS를 줄이고 운동과 독서, 봉사활동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음을 묶어둔 그밖에는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에게 묶어둔 저의 마음을 살펴보려 노력합니다. 그러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저에게 묶어둔 마음이었습니다. 언제부터 묶여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오랫동안 묶여있었고 그 크기와 모양은 제가 감히 따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저의 마음을 꺼내 매듭을 짓고 또한 실패하고 나니 그제서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행위가 참으로 용기 있고 순수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저의 마음은 아직도 어렵습니다. 논란 이후 그의 모습은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그가 달라진 만큼 저 역시 달라진 탓 같기도 합니다. 큰 눈으로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자신감 뒤에 가려졌던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저에게 없는 것을 가진 완벽한 존재가 아닌 그 역시 두려움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가 속한 그룹의 소식이 들려올 때면 자연스럽게 그의 논란 역시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그를 비판하는 쪽과 옹호하는 쪽을 맴돌며 그가 정말 그런 사람인가? 싶다가도 내가 봤던 그는 그럴 리가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서로 다른 의견 사이를 오고 가게 됩니다.

에반게리온 최종판의 제목인 <다카포>는 처음부터,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제목처럼 저는 상반된 의견들을 번갈아 살핀 후엔 언제나 그의 사과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논란에 대해 침묵하거나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과했습니다. 상반된 의견들 사이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의 사과뿐인 것 같습니다.

<다카포>의 마지막에서 신지는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엔 어떤 사도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이 평화롭습니다. 그렇기에 신지는 더 이상 에바에 타지 않아도 됩니다. 신지는 에바에 타는 대신 다른 이의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그 손을 꼭 쥔 채로 성큼성큼 뛰어갑니다. 신지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이전과는 달리 설레고 기뻐하는 마음인 것은 분명합니다. 종현은 어쩌면 이런 ‘다카포’의 결말을, 주변 사람에게 마음을 묶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미싱을 돌리며 시침질을 했던 그 시간 속에서, 얇은 실로 천과 천을 하나로 만드는 그 과정에서 종현은 왜 형이 아닌 자신에게만 이런 일을 시키는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시침질로 천과 천을 묶는 동시에 자신과 종현을 묶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묶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것. 그렇게 묶인 마음으로 서로를 끌어주는 것. 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안노 히데아키에게 약 25년 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요. 우리도 신지처럼 혼자가 아니라 타인의 손을 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