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초 사이에 피어난 장미
작성자 운동가야돼
여자라면 주짓수 한번쯤은
남초 사이에 피어난 장미
여성이 남성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술. 나는 이 말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
여성이 남성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적으로 약한 사람이 더 강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무술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좋지만, 그 말은 꼭 이게 아니라면 지는 게 당연하단 말처럼 들리니까.
그래도 주짓수가 여성이 남성을, 그것도 체급이 한참이나 더 높은 남성을 이길 수 있는 무술임에는 자명하다. 이 가능성이 나를 이렇게 주짓수에 빠지도록 만들었고, 내가 했던 다른 격투기에서 느꼈던 한계점을 해소해 주었다. 내가 훨씬 오래 했고, 잘하는데도 상대가 나보다 신체적으로 조금만 우세해도 한없이 무력해지던 그 허탈함이란.
그럼에도, 주짓수가 번번이 여성이 남성을 이길 수 있는 무술로 통용되는 이유는 단순한 타격이 아닌 상대의 전투 불능을 목표로 하는 무술이고, 체급이나 체형에 많이 치우치지 않는 무술이기 때문이다. 다른 종목에서는 보기 힘든 무체급전(체급 구분 없이 통합되는 경기. 앱솔루트라고 부른다)이 흔한 것도 이를 증명한다.
다른 종목들은 대체로 선호되는, 유리한 체형이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복싱의 경우 팔이 길어야 하고, 수영의 경우 상체가 길어야 하는 등. 하지만 주짓수는 어떤 체형이든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 키가 큰 사람이라면, 특정 가드에서는 굉장히 유리할 수 있겠지만 중심이 높아서 스윕(상대를 넘어뜨리는 것)에 약할 테고, 키가 작다면 리치가 짧아 상대를 미는 동작은 제한이 있을 수 있지만 그만큼 상대의 틈 사이로 파고들어 유리한 포지션을 가져가기에 좋을 것이다. 체구가 크다면 상대방을 압박하기에 유리할 것이고, 체구가 작다면 더욱더 재빠르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을 테니 내가 어떠한 몸을 가지고 있든 그 나름의 장점이 따라오는 것이다.
앞서, 사람의 몸은 성별을 뛰어넘는 다양함이 있으므로 성별에 따른 특징을 단정 짓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다. 이어질 말이 모든 신체를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하여 정상성을 강화하는, 혹은 일반화하는 표현이 될까 매우 우려스럽다. 하지만 오랜 기간 여성으로서 직접 몸으로 부딪쳐 승패를 가르는 격기를 하며 스스로 맞닥뜨렸던 신체적 차이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었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금부터 나올 섣부른 얘기들에 불편한 부분들을 감안해주시길 감히 부탁드리며 글을 잇는다.
게다가 주짓수의 이러한 특성은 체형과 체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체적인 차이-특히 여성인 내가 남성을 상대로 겨룰 때에-가 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체중과 힘은 절대적이다. 주짓수에서는 스파링(대련) 상대로 꼭 여성만 붙여주지는 않기 때문에, 나보다 훨씬 큰, 혹은 힘이 센, 혹은 무거운 남성과 겨루는 일도 흔하다. 이러한 비대칭적인 싸움에서, 권투를 할 때엔 항상 나의 모든 신체적 능력이 핸디캡으로 느껴졌다. 더 강하지 못한 것, 더 무겁지 못한 것. 키가 더 작기 때문에 주먹이 닿는 위치 또한 내가 더 짧은 것. 내가 더 약하기 때문에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더라도 무시하기 어려운 충격이 내게 허용되는 것.
하지만 주짓수는 그렇지 않았다. 주짓수는 상대방을 불리한 포지션으로 압박하고 목을 조르거나, 관절을 비틀어 꺾는 공격이 많다. 상대방이 나보다 덩치가 큰 남성일지라도, 나는 상대적으로 골격이 작고 몸이 유연해 상대의 압박에서 빠져나오기 수월했다. 이러한 부분들은 내가 남성을 상대하다가 여성을 상대하게 될 때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발목을 꺾는 기술(앵클락)을 사용할 때도 남성보단 여성에게 할 때 실패하는 경우가 잦았다. (상대적으로) 관절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이 더 넓기 때문에, 보다 더 정확하고 깊게 기술을 걸어야만 탭을 받을 수 있었다.
또, 라쏘*(자신의 다리로 상대방의 팔을 옭아매어 상대의 상체를 컨트롤하는 가드)의 경우에도, 여성은 남성보다 고관절이 유연하기 때문에 커버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고도 배웠다.
게다가 신체 중심도 남성과 여성은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남성의 경우 상체 쪽으로 무게가 많이 실려있어 아래(가드)에 위치한 상황에서 스윕이 상대적으로 쉬운 반면, 여성의 경우 골반 쪽으로 무게가 많이 실려있어 바로 던지는 기술이 잘 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주짓수는 기본적으로 구르는 동작이 많기 때문에 인버티드* 동작이 가능한 게 필수적인데, 이 또한 여성의 신체에 더 쉬운 동작이다.
물론 더 유연하고 부드럽다고 하더라도, 남성보다 힘이 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꽤 할만한 게임이다. 왜냐하면 주짓수는 힘에 힘으로 맞대응하는 게 아니니까. 심지어는, 힘을 빼야만 가능한 움직임이 대부분이기도 하다. 힘을 낭비하지 않는 만큼 당신은 더 간결하게 움직일 수 있는 데다 힘이 약하다 하더라도 얼마든 기술로 파훼할 수 있고, 당신이 그 기술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힘뿐만 아니라 민첩성과 유연성 등 당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자질로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신체가 가지는 의외의 유리함(가동 범위, 무게중심, 유연성 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주짓수에서만큼은, 나의 몸이 더 이상 나의 핸디캡이 아닌 것이다. 나의 몸이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감각을 주짓수에서 처음 느껴볼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그 느낌이 아주 낯설고, 또 소중했다.
그래서 여자들은 반드시 주짓수를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1개월이나 3개월 같은 얘기가 아니다. 무조건 2년 이상이다. 그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단언한다. 거창하게 잘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블루 벨트를 받아서, 흰띠와는 다른 취급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쳐들어온 흰띠 초보자들 상대로는 탭을 받아봐야 한다. 결백한 승리를 반드시 가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신이 초급자 남성을 이겼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난데없이 밤길이 안전해지지도 않을 거고, 이유 없는 혐오와 범죄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강한 여성인 당신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다. ‘그래봤자 일반인 남자랑은 안되지’, 혹은 ‘이거 완전 남자네’ 하는 가당치도 않은 말로.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당신에겐 어떠한 경험이 있다. 영영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한번 생긴 이상 절대로 흐릿해지지 않을 선명한 경험이 있다.
당신은 이제, 순수한 폭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다. 온전한 승리가 무엇인지 겪어본 사람이다. 단순히 아등바등 애매모호하게 이기는 게 아니다. 제삼자인 누군가가 정해주는 게 아니다. 그 상대로부터. 이 싸움의 당사자로부터 포기와 굴복을 받아낼 수 있다. 설령 그것이 주짓수란 무술의 룰 안에서 국한된 것이어도 상관없다. 당신은 여성의 몸으로, 어디서든 약체 취급을 받는 그 몸으로. 사실 여차하면 생수통 정도 마셔버릴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생수통 하나 못 가는 취급을 받는 그 몸으로. 그 대단한 ‘일반인 남성’이란 존재를 꺾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게 된다면.
WIN OR LEARN.
이전에 말했다시피 아주 유명한 슬로건이다. 이기거나 배우거나. 당신은 진 게 아니다. 어떠한 방법을 배운 것이다.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란 말이 너무 고리타분하다면 이 말을 되새겨보라. 이기거나, 배우거나. 오직 둘 중 하나인 것이고, 무엇도 손해 볼 것 없는 게임이다. 정신 승리 같나?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만두지 않는 이상 다음이란 기회는 무한하다. 그게 전부다.
그러니 당신은 그저 배우면 된다. 어떻게 해야 했는지, 어떤 것을 하지 말아야 했는지.
그저 다치지만 않으면 된다. 그럼, 당신은 다시 강해질 수 있다. 이건 마치 세이브 포인트가 정해진 게임과도 같다. 수많은 모험이 있을 것이고 몇 번이나 캐릭터가 죽어도, 절대 약해지지 않는다. 경험치가 쌓여갈 뿐이다. 당신은 당신 그 자체로 이미 준비되어 있고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시작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여자라면 주짓수 한번쯤은
1편: 모두를 쥐어팰 수만 있다면
2편: 완전무결한 패배
3편: 남초 사이에 피어난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