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무결한 패배

완전무결한 패배

작성자 운동가야돼

여자라면 주짓수 한번쯤은

완전무결한 패배

운동가야돼
운동가야돼
@taptapt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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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짓수를 시작할 때의 나는 이런저런 일로 아주 진력이 다 빠진 상태였고, 너덜너덜해진 동시에 화가 많았다. 아무래도 격투기를 다시 해야 하겠는데, 꽤 오래 해왔던 권투를 다시 하기엔 그 치열함 속으로 날 집어넣을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타격기 특유의 직접적인 공격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고, 아주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괜히 도복을 입고 하는 걸 하고 싶어서 유도와 주짓수 중 무얼 해야 하나 고민하던 내게 탁 꽂힌 문장이 있었다. 

"가장 치열하지 않은 격투기"

정확히 저런 문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내겐 그렇게 다가왔다. 확실히, 치열한 손싸움과 전광석화 같은 업어치기로 경기를 판가름하는 유도보다는,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누워서 시작하는 주짓수가 좀 더 여유 있어 보이기는 했다. 직접적인 타격이 전혀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주짓수는, 시작부터 꽤 충격이었다. 

“이게 반칙이 아니라고요??”

관절을 비틀어 꺾고, 조르기로 제압하고… 다 좋다. 이정도는 알고 들어왔다. 하지만 누운 사람 명치에 냅다 무릎을 찍어 눌러도(피지컬 100에서 이슈가 되었던 그 기술이 맞다) 반칙이 아니라니 그건 좀 충격이었다. 심지어 목조르기도, UFC 경기에서 보던, 뭔가 양팔로 조르는 것뿐만 아니라 냅다 주먹으로 찍어 누르기도 하고. 언뜻 봐서는 설렁설렁 구르는 모양이었던 주짓수가, 가까이 들여다보니 사생결단의 혈투였던 것이다. 

<피지컬: 100 시즌 1>, 넷플릭스, 2023 | 3화에 나왔던 주짓수 기술인 니온밸리. 본래는 명치나 복부를 압박하는 것인데 가슴으로 기술이 들어와 논란이 불거졌지만 춘리는 “운동인으로써 정당하게 대결하였고 저는 이 대결에 대해 아무런 문제나 불만이 없었습니다.” 라고 입장을 밝혔다

게다가 습관처럼 온몸에 힘이 뻣뻣하게 들어가니 닿는 곳마다 아팠다. 잘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힘을 훨씬 적게 쓰는 것 같은데,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완전히 다른 레벨이었다. 잡았다! 싶으면 모래알처럼 빠져나갔고, 막는다고 막았는데도 생각지도 못한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정말이지 나랑은 정반대의 움직임이었다. 나는 온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 탓에 잡혔다 하면 바로 관절기를 허용했고, 깔려있을 땐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쳤지만 결국엔 혼자 힘들어서 숨을 헉헉거렸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관절을 이렇게 기술적으로 꺾여보는 건 또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복싱에서 맞았던 건 그냥 아프고 말았던 건데, 이쪽은 정말 신체 훼손에 대한 공포가 몰려들었다. 이거 정말 자칫하다간 병원 신세는 당연하고 잘하면 후유장애까지 얻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 모든 상황들은 정말 간결하게 종료할 수 있었다. 손으로 상대의 몸을, 혹은 바닥을 두세 번 두드리는 것. 혹은, 

“…탭!”

구차하게 두 손이 묶여있다면 저렇게 말로 해도 된다. 그러고 나면 아무런 살의도 없는 파트너가 말끔한 얼굴로 땀을 뚝뚝 흘리며 손을 내민다. 손바닥을 한번 스치고, 주먹끼리 부딪히면 작은 충격이 다시 몸을 깨운다. 게임 리셋이다. 목이 졸렸든 팔이 꺾였든 뭐가 됐든 내가 힘들면 탭치고 나오면 되는 것이고, 그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내가 왜 난데없이 이 사람한테 깔려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름 모를 두려움이 순수한 즐거움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쉽게 그만둘 수 있으며 그다음 기회도 당연하게 주어진다니. 게임 같았다. 볼링 게임에서 스트라이크에 실패하면 그다음은 집에 가야 하는 게 아니다. 공을 다시 한번 던질 수 있는 거다.

tap, tap, tap!

그런데, 권투는 어땠었지. 대회는 같은체급 여성과 하긴 하지만 스파링 시간에 나보다 강한 상대를 이겼을 때엔, 이겨도 이긴 것 같지가 않았다. 상대가 나를 봐준 게 아닐까? 관장님이 내가 여자고 체급이 낮기 때문에 그런 걸 감안해서 내가 이겼다고 해준 게 아닐까? 하는 의심들이 줄지어 따라왔다. 그리고 상대도, ‘여자애라 내가 봐줬다’ 싶은 얼굴일 때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상대가 나보다 강하고 무서우면 최대한 덜 맞으려고 가드를 바짝 올리고, 도망가고. 거리를 두고. 종이 치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등이 보이도록 도망치는 것도, 기권을 하는 것도 선택지에 없었다. 복싱에서 기권이란 지는 것보다 훨씬 굴욕적일 일이었으니까. 복서 정신이 원래 그렇다고 배웠다. <록키>같은 헝그리 정신으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같은 7전8기의 기적을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복싱만 이런 게 아니고 대부분의 격투기가 이러할 것이다. 기권이 이렇게도 흔한, 아니 애초에 상대의 기권을 받아내는 게 목적인 격투기는 주짓수밖에 없지 않을까. 태권도와 유도, 레슬링같은 경우 점수로 판가름나고, 복싱과 무에타이, MMA는 심판의 판정으로 판가름난다. 그 외에도 대부분의 종목들이 점수 혹은 심판의 판정일 것이다. 물론 주짓수도 제한 시간 동안 서브미션(기권을 받아내는 공격)이 나오지 않은 경우 점수로, 점수마저도 나오지 않은 경우 끝의 끝에선 심판이 판정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권을 받아내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는 목표이기 때문에, 플레이어 본인이 자신의 패배를 결정한다는 점이 주짓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인 것이다. 

만약 격투기를 시작한다면, 당신은 당연히 실패하는 것부터, 지는 것부터 시작한다. 당연하다고 해도 패배는 언제나 씁쓸하겠지만 만약 그것을 결정하는 게 내가 된다면, 뭔가 조금은 다른 의미가 생긴다. 나의 패배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내가 선언함으로서, 억울함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패배는 곧 다음 기회가 된다. WIN OR LEARN. 이기거나 배우거나. 주짓수에선 아주 흔히 쓰이는 말이다. 주짓수는 특성상 끝의 끝까지 몰리더라도 탭을 치기 전까지 나름의 활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번 실패하고 패배하더라도 플레이어는 다음 수를 배울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결국엔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실패에 의연해지면서,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만들어지는 자신만의 움직임. 그것이 당신의 주짓수가 된다. 

그러다 보면 당신에게 승리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앞선 글에선 당신이 당신보다 강한 사람을 꼭 이겨봤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주짓수의 ‘기권’ 이라는 개념은 이 부분에서도 아주 각별하다. 

약자로서의 싸움은 단순한 힘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은 자존심의 문제일 수 있다. 어쩌면 존재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성인 여성이고 상대가 몸집이 더 큰 성인 남성이었을 때를 가정해 본다면, 다른 투기 종목에선 당신이 상대를 이긴다고 해도 그 승패는 당신이나 상대가 아닌 제3의 존재(점수 혹은 심판) 이 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는 생각한다. 내가 봐줬다고. 그리고 놀랍게도, 그 거만함은 은근하게 당신이 알아챌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봐줬고, 따라서 언제든 당신을 이길 수 있다는 제스쳐를 취하는 것까지가 그들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당신의 승리는 흐릿해진다. 내가 이긴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게 반복되면 승리는 영영 내게 허락되지 않는 것만 같단 착각마저 든다. 

하지만 주짓수에서는 어떤가. 당신이 탭을 받았다고 생각해 본다면, 상대에겐 어떤 변명도 없다. 힘을 쓰지 않았건 뭐가 어쨌건 상대는 당신에게 기절 직전까지 혹은 관절이 부러지기 직전까지 몰려서 스스로 기권을 선언했다. 이거야말로 당신의 완벽하고 무결한 승리다. 어떠한 이견도 없다. 상대가, 자신의 의지로 당신에게 항복을 선언한 것이니까.  

육체적으로, 강자를 상대로 이토록 결백한 승리를 가져본 적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성으로서의 격투기는 언제나 언더독의 삶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경기장일수록 역전은 근사하다.

시리즈3개의 아티클

여자라면 주짓수 한번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