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쥐어팰 수만 있다면
작성자 운동가야돼
여자라면 주짓수 한번쯤은
모두를 쥐어팰 수만 있다면
나는 여자고, 4년째 주짓수를 하고 있다. 그전에는 몇 년 동안 복싱을 했었다. 둘 다 대회를 여럿 나갔고, 항상 위험한 취미를 가지고 살아서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양분삼아 자랐다. 이어서 시작될 몇 편의 글을 축약하자면, ‘당신은 순수한 폭력을 경험해 봐야한다.’ 이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이 여성이라면, 남성을 상대로. 당신이 왜소한 사람이라면, 더 큰 사람을 상대로. 당신이 나약하다면, 더 강인한 사람을 상대로 한 번쯤 줘 패봤으면 좋겠다-‘이다.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것이 나의 진심이다.
당신은 일단 ‘폭력’이란 말에 주춤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 말에 대한 해명을 이제부터 늘어놓겠다. 폭력이 순수한 건 뭔지. 그게 어떤 건지. 왜 해야 하는지.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인용한 부분에서, 저자는 모욕, 체벌, 의례, 훈육과 복종 등. 우리가 흔히 폭력을 생각하고 겪었을 때에 따라오는 것들로부터 ‘폭력’ 에 관한 구별을 제시한다. 아마 우리가 겪어온 대부분의 폭력은 위와 같을 것이다. 어릴 때 부모님께 종아리를 맞던 일. 학교에서 엎드려뻗친 채 엉덩이를 맞던 일. 혹은 회사에서 상사가 손가락 끝으로 내 어깨를 찔러대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일, 나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 폭력을 가하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나의 의지와 자유를 빼앗는 걸 그대로 두었던 모든 일.
현대 사회에서 신분제도는 없긴 하지만, 아직도 위계에 의한 폭력은 빈번히 일어난다. 성별에 의해, 권위에 의해. 혹은 단순히 신체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위계에 의한 폭력에서 가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을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구분 짓는다면 나는 항상 ‘피지배 계급’ 에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내가 격투기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상대의 계급에 따라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지배 계급에 걸쳐진 사람들에게선 나를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았다. 여자애가 그런 것 좀 배워봐야 남자를 상대로 이길 수가 있겠느냐, 하는 무시. 반면 상대가 체구가 작은 여성이거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인 경우에는 대부분 걱정부터 했다.
“그런 위험한 걸 왜 해? 아프지 않아? 무섭지 않아?”
너무 많이 들어본 질문이다. 폭력을 정의하지 못하고 다른 것들과 혼동하던 나는 저 질문에 항상 말이 막혔다. "글쎄, 재밌는데." 하는 게 최선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서로 생각하는 폭력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저 질문을 하는 사람은 순수한 폭력이 무엇인지 모르고 경험해 본 적도 없다. 그 사람에게 폭력은 언제나 합당하지 못했고, 자유롭지 못했으며 나의 의지와 자유를 빼앗기는 불쾌하고 괴로운 일이니까. 스스로의 사회적 위치를 건 싸움도, 위계로 짓눌려진 혹은 짓눌렀던 폭력도, 복종을 갖다 바쳐야 하는 훈육도 모두, 순수한 폭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순수한 폭력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무런 상징성도 띠지 않는 날 것 그대로의 폭력이다. 거기엔 아무 의미도 없다. 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명예가 추락하는 것은 아니다. 다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내가 모욕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싸움의 시작과 끝 모두 서로에게 선택권이 있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회피할 수도 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싸움엔 복종이 없다. 나는 오직 나를 위해 동의한다. 내게 닥쳐오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그러니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위험하지 않다. 상대의 목적은 본인의 기쁨일 뿐, 나를 죽이거나, 망가뜨리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물론 예상 못 한 사고는 있을 수 있지만, 그건 격투기가 아닌 뭘 해도 마찬가지다. 사고는 걷다가도 먹다가도 자다가도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아프지도 않다. 내 몸 여기저기 남은 멍들을 본다면 믿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다. 우리가 어떠한 폭력에서,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신체적인 고통을 아득히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무력감, 수치심. 두려움과 모욕감. 나는 교통사고가 나서 앰뷸런스에 곧바로 실려 간 적이 있다. 아팠었나?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스팔트가 뜨거웠던 것이 차라리 더 선명하다. 상대의 연습을 받아주다가 상대의 실수로 운 나쁘게 골절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괴로웠나? 전치 4주였지만 솔직히 타투가 더 아팠다. 뼈가 부러졌던 그 당시엔 통증보다 놀란 게 컸을 뿐이다.
정말이지 신체적 고통은, 하물며 사람과 사람이 아무런 악의도 없이 의도치 않게 부딪혀 일어난 데에서 오는 통증은 정말 별것 아니다. 그곳엔 정신적인 외상이 전혀 없으니까. 하지만 어릴 때 부모에게 뺨을 맞거나. 학생 때 손바닥을 맞던 걸 생각하면 어떤 고통과 괴로움이 훨씬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 그 폭력은 순수하지 못했고, 나의 신체뿐만 아니라 나의 자유와 정신을 다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섭지 않다. 이것은 도망치면 나의 명예가 추락하는 ‘결투’도 아니고. 도저히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일방적인 폭력도 아니다. 원한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언제든 꺼버릴 수 있는 게임에서, 강력한 상대를 만났다 한들 실제의 내가 두려울 필요는 없는 것처럼.
“맞는거 너무 싫지 않아?” 혹은, “사람 때리는 거 난 못 하겠던데.”
이것도 예전엔 대답이 참 어려웠다. 맞는 거야 싫지. 지는 것도 싫다. 하지만 그냥 싫은 게 전부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는 건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쓰는 게 재밌는 것처럼. 사람 때리는 게 왜 어렵지. 어차피 나랑 고만고만한 사람과 붙는 건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나는 대로 대답을 했다간, 자칫하면 무뢰배처럼 보이거나 굉장히 미개한 사람처럼 보이기 쉬웠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말을 흐렸다. “그냥 뭐, 생각보다 안 아파요. 보호장구도 있고 뭐…”
하지만 이제야 나는 해답을 찾았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던 것이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폭력은 조금도 순수하지 않다. 위계가 있고 모욕이 있고 복종이 있고 무력함이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폭력은 그렇지 않은데!
맞는 거? 당연히 싫지. 나보다 높은 위계를 가진 사람이 날 길들이기 위해 하는 것이라면 치가 떨리도록 싫다. 때리는 거? 당연히 하고싶지 않다. 나이, 권위, 신체 조건 등 어떤 이유로든 내게 대항할 수 없는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면 맞는 것 이상으로 하고 싶지 않다.
순수하지 못한 폭력으로 대입하면 이 사람들의 말이 모두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아, 이 사람들. 순수한 폭력이란 걸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뭔지도 모르거니와 심지어는 상상조차 쉽지 않다는 것을.
여담으로, 도장에서 남자 관원을 기절시킨 적이 있다. (주짓수 도장에서는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일이다. 초크가 애매하게 들어왔을 때에, 오히려 기절하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산소 부족인 다이버가 원인 모를 자신감에 가득 차 더 깊은 심해로 빠져들어 간다던데. 같은 이유 아닐까. 숨통이 콱 막히면 정상적인 사고로 탭을 치고 빠져나오지만, 서서히 산소가 부족해지면 뭔가 몽롱해지면서 이거 왠지 할만할 것 같단 착각이 든다.)
사과도 했고, 조금 걱정했지만 솔직히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왜 탭을 빨리 안 쳐요.” 하며 웃었다. 당연히 상대방도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와, 침 나와요.” 하면서. 근데 우리집 강아지 발을 밟았을 때는 정말 너무 미안해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차이가 어디서 오는 걸까. 남관원과는 서로 동의한 싸움이고, 상대는 얼마든지 관둘 수 있었고, 내게 맞서 싸울 수도 있지만 우리집 바보개는 그중 하나도 해당되는 게 없으니까.
조금 다른 얘기를 하자면, 위 인용한 책의 일부에서 현대인이라면 조금 동떨어지는 부분이 아마 ‘결투’ 에 대한 것일 텐데. 이것도 이 ‘결투’ 를 너무 남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든 싫든 결투를 벌여야 할 위기에 처했음에도 어쩔 줄 몰라 넘어가고 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지금 얘기할 경우의 ‘결투’ 라는것은 다시 생각해 보면 ‘맞다이’ ‘맞짱’ 등으로 바꿔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감상 결투보다 훨씬 더 경박하고 추저분해 보이지만 명예로운 중세 귀족이 아닌, 초라한 자아를 가진 분들이 주로 벌인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게 더 적당한 말인 것 같다.
도장에서, 이따금 초심자 남성분들이 스파링(대련)시간에 맞다이를 신청하는 경우가 있다. 이건 분명히 맞짱이다. 중급자 여성으로서는 지긋지긋한 일이다. 약하고 거대한… 개복치 같은 자아를 가진 남성이 생각하기에, 초급자 여성은 당연히 이길거라 생각해서 패스하고 좀 해 보이는 여성 정도는 자신이 멋지게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해서 손을 내미는 것이다. 이런 경우 내가 어떻게 이 게임이 ‘결투’ 라는 것을 느끼냐면, 이 사람이 신체적인 고통을 훌쩍 넘어서서 괴로워하는 것이 보일 때 확신할 수 있다. 나보다 체급이 더 높은 사람에게 내가 몸무게로 압박을 가해봤자 그 순수한 통증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말 때에. 초크를 걸어봐야 풀고 나면 남은 통증은 거의 없을 텐데도 익사 직전의 사람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숨을 씩씩거릴 때. 나는 확신한다. 이건 맞짱이고, 내가 받아줬으나 어쨌든 쟤는 졌고. 이걸로 저 사람은 자존심이 크게 꺾였다는 걸. 그 다음 상황은 두 가지다. 첫 번째. 자존심이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을 쉽게 무시하는 성격이 조금이나마 고쳐져서 앞으로 운동 계속 나오며 정신과 신체가 성장하는 사람. 두 번째. 상처받은 마음을 부여잡고 다신 나오지 않는 사람. 둘 다 내게 별로 나쁜 결과는 아니다. ‘그래도 아득바득 나오는 사람 있지 않아요?’ 물론 있다. 하지만 주짓수의 특성상. 자존심이 세면 기권을 아끼게 된다. 그런 사람은 굳이 내가 상대하지 않더라도, 한 달 내로 어딘가 돌이킬 수 없이 다쳐서 나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반대의 경우로, 결투라는 개념이 너무나도 생소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그런 사람들은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향한 폭력에 동의한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특히 신체적인 폭력에는 말이다. “나는 부모님께도 체벌을 당해본 적 없고 학교에서도 안 맞고 자랐어.” 하는 사람들.
하지만 이런 적조차 없을까? 누군가 악의를 담아 어깨를 세게 밀치고 지나간다던지, 지하철에서 꽤 힘을 주어 내 다리를 미는 남의 허벅지라든지. 버스에서 분명하게 내 몸을 쥐었다 사라지는 주인 모를 손 같은 것들. 분명 동의한 적 없지만 그 순간의 고민들로 당신은 몸이 굳었던 적 없는가. 소리쳐야 하나? 뺨이라도 한 대 쳐야 하나. 하지만 그랬다간 더 일이 커지고 말 텐데. 내가 이길 수 없을 텐데. 분노는 형태 없이 불쑥 튀어나오지만, 몸은 전혀 준비되지 못한 채 흘러버린 타이밍. 그러고 나면 묘한 무력감만 남는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저 사람에겐 이게 ‘그래도 되는’ 일의 하나로 남겠지. 피해자의 입장에서 순식간에 들이닥치는 무력함이란, 동의와 구분하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위계로 인한 폭력에 익숙해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폭력’이란 말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위의 상황에서, 폭행이 순수히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성적인 추행이나 폭언을 포함한다고 해도. 상대가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았으므로, 나의 명예를 훼손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투를 해야 할 상태에 놓이게 된다. 경찰을 부르든 뺨을 때리든 소리를 지르든 반항하는 뭔가를 해야만 한다. 현대사회이므로 그 승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저 그 결투를 시작하는 것만이 내게 남은 선택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성은. 그 선택마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으니까.)
그러니 다시금 결론을 짓자면. 우리는 폭력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모욕과, 결투와, 훈육이 아닌 싸움으로 몸을 내던져볼 필요가 있다. 방법이 무엇이든 상관없다. 당신은 포기와 실패와 승리를 경험해 봐야 한다. 내게 그 방법은 권투였지만 한계에 부딪혀 주짓수로 선택을 바꿨다. 이제는 그 이유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