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는 파인다이닝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
작성자 고슴이의비트
비욘드 트렌드
흑백요리사는 파인다이닝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
요즘 어딜 가든 이 프로그램 얘기로 난리잖아요.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인데요. 9월 중순에 처음 공개된 이후 그야말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어요. 지난 8일 마침내 11~12회가 공개되며 막을 내렸고요.
저는 “아직도 안 봤어?” 하는 얘기를 계속 듣다가 한 걸음 늦게 유행에 탑승했는데요. 오늘 비욘드 트렌드는 ‘흑백요리사 열풍’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봤어요.
* 이 글에는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에 대한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훑어보기 👀: 모두를 들썩이게 만든 흑백요리사의 압도적 인기 🔥
지난 몇 주 동안 어딜 가든 흑백요리사를 빼면 대화가 안 되는 분위기였잖아요. 아직 안 봤더라도 얘기는 많이 들어봤을 텐데요. 흑백요리사는 ‘계급 전쟁’이라는 부제처럼 ‘백수저’ 요리사와 ‘흑수저’ 요리사의 대결을 컨셉으로 전개되는 요리 서바이벌 예능이에요. 각자의 분야에서 엄청난 경력과 명성을 쌓은 20인의 백수저 셰프들이,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자기 자리에서 실력을 키워온 80인의 흑수저 셰프들과 경쟁하는 것.
흑백요리사는 단연 지금 이 순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제인 프로그램이에요. 방송 초기부터 각종 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 1위, 비드라마 부문 ‘화제성’ 1위 등을 찍었거든요. 해외에서의 인기도 심상치 않은데요. 시청 수를 기준으로 3주 연속 넷플릭스 비영어권 TV시리즈 부문 1위에 올랐어요. 외신에서 흑백요리사의 인기를 조명하기도 했고요.
온라인에서는 “나야. 들기름”을 읊조리는 출연자 인터뷰, “채소의 익힘 정도”나 재료가 “이븐하게” 익었는지를 논하는 심사위원의 심사평을 패러디한 각종 밈이 끝도 없이 쏟아지고 있어요. 출연자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예약이 폭주하고 있고요. 우승자가 운영하는 식당을 예약하려는 사람 11만 명이 한꺼번에 몰리며 예약 앱 ‘캐치테이블’이 한동안 먹통이 되는 일까지 있었다고. 각종 인터뷰와 화보, 유튜브 영상 등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콘텐츠도 쏟아져나오는 중이에요.
기업들도 흑백요리사의 인기에 발 빠르게 올라타고 있어요. CU는 방송에서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은 ‘밤 티라미수’를 정식 출시하고, GS25는 ‘이모카세 1호’와 ‘만찢남’, ‘철가방요리사’ 등 출연자들과 협업한 간편식 메뉴를 출시해요. ‘네이버지도’는 출연자들이 운영하는 식당 100곳을 모은 목록을 공개했고요.
각종 매체에서는 흑백요리사의 인기를 다룬 기사와 분석, 평론이 쏟아지고 있어요. “한국인의 정서에 딱 맞는 경연”이라는 꽤나 후한 평가가 있는 반면, 경쟁의 룰을 문제 삼으며 프로그램의 완성도가 ‘이븐하지 않다’고 지적하는 의견도 나왔어요. 흑백요리사가 “계급적으로도 젠더적으로도 불평등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식의 비평이 나오기도 했고요. 팀 대결 라운드에서는 경쟁 규칙이 출연자들의 능력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었어요.
그동안 서바이벌 예능도, 요리 프로그램도, 요리 서바이벌 예능도 많이 나왔는데요. 흑백요리사의 인기는 또 다른 차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흑백요리사는 대체 어떻게 사람들을 사로잡은 걸까요?
자세히 보기 🔎: 흑백요리사가 보여준 깊고 진한 세계 🧑🍳
흑백요리사를 보면서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영리하게 만든 프로그램’이라는 거였어요. 사실 보기 전에는 ‘계급전쟁’이라는 컨셉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1화에서 흑수저 출연자들이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내는 장면도 나오고요. 하지만 점점 계급 구도보다는 출연자 개개인의 캐릭터에 집중해서 보게 되더라고요. 서로를 도발(?)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흑수저와 백수저가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부분도 흥미로웠고요. ‘계급전쟁’이라는 조금은 자극적인 컨셉으로 초반에 시청자의 시선을 잡아끈 다음, 출연자들의 서사를 무리 없이 풀어나간 거예요.
프로그램 자체의 압도적인 스케일 얘기도 빼놓을 수 없을 거예요. 방영 전 제작발표회에서 제작진은 “대한민국 요리 예능 역사상 이런 스케일은 없었다”고 했는데요. 1000평 규모의 초대형 세트장을 짓는 데에만 한 달을 쏟아부었다고. 출연자 수십 명이 동시에 요리를 할 수 있도록 싱크대와 상·하수도, 가스를 설치했고요. 각종 식재료와 부자재로 가득한 거대한 팬트리, CU 직원 30명이 동원돼 상품 3000여 개를 통째로 옮겨놓은 편의점 세트장도 눈길을 사로잡았어요. 백종원 심사위원은 이름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는 ‘요리의 대가’들을 한 자리에 모은 걸 두고 “역사적인 일이고 이후에도 없을 대단한 일”이라고 평하기도 했고요.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출연자의 개성과 서사가 부각된 점도 인기 요인으로 꼽을 만해요. 만화책으로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그야말로 만화같은 출연자, 평생 고민한 자신의 정체성을 요리에 담아낸 한국계 미국인 출연자 등 나열하면 끝도 없을 텐데요. 흑수저와 백수저에 속한 출연자들이 경력과 명성의 차이를 넘어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호평 포인트였어요.
라운드마다 바뀌는 경쟁 규칙도 흥미를 끄는 요소인데요. 그중에서도 흑수저 vs. 백수저 1:1 대결에서 심사위원들이 안대로 눈을 가린 채 맛으로만 음식을 평가하도록 한 게 화제였어요. 공정한 평가를 위한 나름의 장치였는데, 무명 셰프가 ‘미슐랭 셰프’를 꺾는 장면으로 이어지며 시청자들을 열광하게 한 것. 후반 라운드에서 ‘인생 요리’ 미션 등을 통해 출연자 개인의 서사를 진하게 담아낸 것도 시청자들의 감정을 건드렸고요.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요리 과정과 결과물을 지켜보는 재미가 컸어요. 저는 종종 요리 프로그램을 챙겨 보는데요. 처음 다뤄보는 재료를 뚝딱 손질해 세상에 없던 요리를 내놓거나, 똑같은 재료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완전히 다른 요리를 선보이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돋더라고요. 여러 조건을 제한한 미션에서 출연자들이 기지와 창의력을 발휘해 요리를 해내는 걸 보면서는 어떤 경외감이 들기도 했고요.
요리에 대한 대중의 높아진 이해와 관심을 근거로 ‘파인다이닝의 부활’을 점치는 의견도 조심스레 나와요. ‘요리사’가 아닌 ‘셰프’들이 방송에 연달아 등장해 주목받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파인다이닝이 대중적인 관심을 반짝 끌었던 때가 있었는데요. 전체 외식업계에서 파인다이닝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극히 적은 수준이에요. 파인다이닝 업계가 위기라는 말은 계속 나왔고요. 그런 상황에서 흑백요리사가 반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파인다이닝에서조차 ‘가성비’를 따졌던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요리는 엄청나게 깊고 넓은 세계예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식재료를 ‘타이트하게’ 활용해 셀 수 없이 많은 조리법을 적절히 동원한 다음, ‘익힘 정도’와 ‘텍스쳐’를 정교하게 완성해가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이니까요. 꼭 파인다이닝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처 몰랐던 분야에 대해 알아가는 건 꽤 뜻깊은 일이에요.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세계’가 있고, 거기에는 자기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며 나름의 경지에 올라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한 뼘 넓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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