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외] 한강에게 바치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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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llreview

금주의 한-탄

[호외] 한강에게 바치는 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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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신드롬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침착맨이 장모님으로부터 받은 '개.미친. 딱딱한 돌빵'처럼. 회의록 하나 없이 의대정원을 2천 명 늘려야 한다며 기자회견마다 '반드시'를 퍼붓는 정부의 설명처럼. 너무나 단단해서 '그가 잘못 말한' 게 아니라 '내가 잘못 들었'다고 이해될 수밖에 없는 그런 말투였다.

웁스. 왜냐면 나에게 노벨상은 농담 소재였으니까. 이를테면 귤껍질을 한 데 모아 전자레인지에 돌려 '간이 손난로'를 만들어줬던 엄마에게, 고작 고무줄 몇 개와 돌멩이 하나로 새총을 만들어 낸 어릴 적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내 맘대로 수여했던 상이니까. 고작 그것에 불과했으니까. '노벨 엄마최고상'이라든지 '노벨 계란 잘 삶기상'처럼 그저 생활개그 소재로 쓰였던 가볍디 가벼운, 형이상학적인 단어였으니까. 교수님과의 인터뷰는 곧 이렇다 할 의미 없이 마무리됐다.

그런 노벨상을 한강이 수상했다. 로마자 표기에 따라 'Han River'가 되는 그 물줄기가 아니라 진짜 사람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언론사 입사 시험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묻는 질문에 자랑스레 '욘 포세'라 쓰면서도 '내가 이딴 걸 알아야 하나' 물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욘 포세는 지구 반대편 어느 조그마한 나라(서로 무인기를 보기 좋게 날리며 비난의 언어를 서슴지 않아 '적대적 국가 중 하나'로 불리는 나라)의 입사 시험 문제에 자기 이름이 나온 걸 알까. 그래서 욘 포세가 아닌 '연 포세', '욘 포새', '욘 퍼세'라는 오답에 머리를 부여잡고 '탈락'을 예감하는 언론고시생이 있을지도 모를 터. 

하지만 내가 발 디딘 '진짜 현실'에선 방송국이 한강의 27살 때 영상까지 찾아내 '김대중 이후 최초의 노벨상'이라며 치켜세우기 바쁘다. 심지어는 연세대학교 총장이 축전에서 <소년이 간다>라고 썼다가 번복하는 일까지 새삼스럽지 않게 벌어지고 있고, '축하의 민족'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할 지경이다. 어지럽다. 좋은 의미로 어지럽다.

(이미 밝혔던 것처럼) 노벨상 수상 직후 공개된 <매일경제> 단독 인터뷰를 정독하다가 '부럽다 김유태!'를 외쳤더랬다. [단독]이라는 단어에 유혹되지 않으려 선입견을 배제하고 한 문장씩 꼼꼼히 살폈다. 성실한 질문과 매력적인 답변에 녹아들었다. 한동안 그 문장들을 안성재 셰프처럼 우걱우걱 씹었다. '문장의 현학(衒學) 정도가 이븐(even)한지' 생각했다. 백종원이 눈을 가리고도 "싸바용?"을 외칠 수 있을 만큼 김유태 문장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애썼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 부끄럽게도.

부끄러움을 잊어갈 때쯤, 진짜 김유태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20241014 <매일경제> 김유태 기자 개인 페이스북 

공감했다. 맞말, 맞말 또 맞말. 'correctness'가 아니라 'empathy'에 가까웠지만 아무렴 어때. 이동진 평론가는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영화 <다른 나라에서> 한줄평을 이렇게 남겼다. 

이제 이 말은 마치 이동진의 그것(예컨대 '명징하게 직조해낸 밈')처럼 써먹을 때다. 한강 작가 작품을 번역서로 보지 않는다는 건 "외국 독자들은 제대로 못 느낄 뉘앙스까지 만끽할 수 있는 한국 독자들의 복"이다. 단언한다.

따라서 우리는 김유태의 말처럼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을 마주했다. 모두가 문학 이야기를 하고, 서로 감상을 나누는 신드롬 말이다.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과 말하던 주제를 이제 지나가는 '행인1'과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거칠게 말하면, 이것이야말로 '한강의 기적'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가장 유사한 경험은 2017년이었다. 정당하게 선출된 권력이 정당하게 해체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토론했다. 정치란 무엇이고, 대통령이란 무엇이어야 하는지 나눴다. 서로 생각이 달라도 합의한 결과는 '개인적 유불리에 휘둘리지 않고 인정해야 한다'는 기초 원칙을 다시금 되새겼다. 한층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한 계기였다(고 믿는다). 형식적인 민주화 이후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룩한 경험이었다(고 믿는다).

문학이라는 유령이 한국을 떠돌고 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선 '모 출판사 직원에게 수개월치 월급이 보너스로 나왔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밤을 새워 일하느라 집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취재하는 기자들과 '그 정도면 나 같아도 밤새도록 일하겠다'는 댓글이 휘몰아치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 정세랑 작가의 <아라의 소설>을 읽었다.

한강을 따라 걷는다. 물론 망나니 짓은 하지 않는다. 그저 뒷모습을 따라 걷을 뿐이었다. 이렇게 뒷모습을 따라 걷는 게 소설 속 아라처럼 삶의 좋은 가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웨덴 대사관 앞에 몰려가 '역사를 왜곡한 한강을 비난하며 노벨상 수상 자체를 반대한 단체'들이 못마땅했다. 물론 그들에게 '노벨 문학상은 작품에 시상하지 않고, 작가에게 시상하는 것'이라는 기꺼운 설명도 하고 싶었다. 내 기준에선 그건 가늠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변상욱 기자의 칼럼(20241014 미디어오늘發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에서 가장 황당했던 존재는 언론이었다>)처럼 "왜 5·18이 ‘세계화’는 이루어내도 ‘전국화’는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는지"(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건 민주당 대선후보들의 오랜 공약이다), "세월호, 이태원 등 ‘우리’라는 공동체를 할퀴어버린 참사들을 소설, 연극, 시로 그려내면 외국 문학상은 수상해도, 국내에선 논란이 되고 블랙리스트에 오르는"지도 묻고 싶다.

스웨덴 한림원은 한강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유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섰"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이태원 참사가 북한 소행이라든지, 제주 4.3 사건이 폭도 토벌작전이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후세대는 듣지 않았으면 한다. 여전히 입에 담는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도 사라졌으면 한다. 역사의 뒤안길에 그런 여유공간은 없으니까.

(20230304 한겨레發 <아2고! 2게 대체 무슨 일2고?>)

문학이라는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그렇다. 이건 유령이다. 분명히 눈앞에 있지만 실체는 없는. 그래서 어쩌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아니 '너무나도 많은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유령이다. 한강은 유령을 소환했다. 감사하게도.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