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둘째 주]
💸 아니 돈이 남아도는 게 아니라 핸드폰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 2019년부터 지금까지 약 5년 반 동안 썼죠.
- (나) 핸드폰 바꿔야 할 것 같은데.. - (엄마 딸) 엄마! 얘 핸드폰 바꾸겠대! 돈이 남아도나 봐~ - (나) 아니.. 삼성페이도 안 되고, 충전 단자도 헐렁거려서 충전도 잘 안 되고, 배터리도 너무 빨리 닳고... - (엄마) 뭘 얼마나 썼다고 망가져? - (나) .....5년 반. 66개월째야. 내가 군대에 있을 때부터 이걸.. - (엄마) 야! 저거 전자레인지도 한 10년 쓴 거야. 그래도 멀쩡하잖아? - (나) 버티고 있는 거지. 멀쩡한 게 아니라. - (엄마) 아니 그럼 좀 일찍 일찍 말하든가. 왜 다 지나서 얘기를 해..
때마침 TV에선 봉준호 감독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습니다(20250209 JTBC發<'미키17'로 돌아온 봉준호 감독 "제 색깔, 작품 곳곳에 담겨 있어요" >).
[앵커] 인간이 얼마나 한심할 수 있는지를 영화에 담으셨다고 했는데요. 감독님의 일상생활에서 한심한 모습들이 있을까요? 내 스스로의 모습이 반영돼 있기도 할까요? [봉준호/감독] 예를 들면 그런 거 있죠. 제가 식탐이 많은데 의사께선 경고를 하시죠. 이러이러한 음식은 먹지 마라. 정말 먹고 싶으면 한 달에 한 번만 먹어라. 그래서 정말 그걸 실천하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만 아이스크림을 먹는다거나 뭐 그러는데. 한 달에 한 번만 먹는 음식이 한 삼십 가지 정도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의사가 먹지 말라는 음식을 매일 먹는 거죠. 종류를 바꿔가면서. 이게 어리석은 건데 근데 왠지 그렇게 하고 싶은 거죠. 그 슈퍼 히어로 같은 또는 영웅적인, 위인 같은 분들 사실 별로 없지 않나요. (맞아요) 누구나 그럴 것 같은데.. 사실 서로가 허술하고 흠결도 있지만 또 그런 걸 서로 이해도 하면서 이렇게 살잖아요. 우리가 완벽하거나 뭐 히어로여서 사는 게 아니라.
갤럭시 S25는 24와 출고가가 똑같아서 가격 부담이 적어 '지금이 기기변경 할 좋은 시점'이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흠결이 있지만 이해하면서 쓰는 핸드폰'과 '허술하지만 이해하면서 사는 사람들' 이 겹쳐 보였으니까요. 핸드폰 바꾸겠다는 얘기는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핸드폰이 완전 먹통되거나 부서지지 않고서야 바꾸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 변화의 충분조건 그러니 언제나 한발 늦고 다급하게 문제를 처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핸드폰이 아니라 '뭐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불감증이니까요.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의 책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건 언제나 '큰 충격'이었고, 그 충격이 없다면 바뀌지도 않죠.
이번 주 하늘이가 세상을 떠난 건 분명히 큰 충격이었습니다. 우울증 등을 앓고 있는 40대 교사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은 아이 앞에서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죠.
하늘이 아버지가 울며 한 글자씩 읽어 내려가는 심경 을 같이 흝었습니다.
■ 故 김하늘 양 아버지의 심경 항상 정부에서는 저출산 국가라고 얘기합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죽이는데 어떤 부모가 안심하고 학교를 보낼 수 있습니까? 하늘이는 몸 수십 군데를 흉기에 찔렸고 저항을 한 것처럼 손에도 엄청난 상처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이가 만약 어제 죽지 않았더라도 타깃이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늘이가 죽지 않아도 누군가 타깃은 됐을 거고, 하늘이가 살았다면 내일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항상 얘기합니다. "엄마, 아빠와 학교 선생님은 너희를 지켜주는 슈퍼맨 같은 사람들이야. 다른 곳에서 너를 부르면 그거는 조심해야 해." 그런데 학교 선생이 죽였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 아무것도 경찰한테 들은 게 없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제2의 하늘이가 나오지 않도록 정부는 '하늘이 법'을 만들어서 심신 미약인 선생님들의 치료를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 하늘이는 별이 되어서 뛰어놀고 있겠지만 앞으로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하늘이는 2월 10일에 죽었고 하늘이 동생이 2월 9일 생일입니다. 앞으로 동생 생일 파티는 어떻게 해줍니까? 2월 8일은 하늘이 할머니 생일이었습니다.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2의 하늘이가 나오지 않을 수 있도록 정부는 하늘이 법을 꼭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 하늘이 동생을 위해서 살아갈 겁니다. 하늘이가 사랑하고 좋아하던 친구들을 더 아껴줄 예정입니다. 다시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하늘이가 천국에서 뛰어놀 수 있게 10초만 기도 부탁드립니다.
엄마 아빠와 선생님은 슈퍼맨이다. 아이 앞에서 뭉툭했던 문장이 이제는 너무나도 예리하게 꽂힙니다.
아버지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하늘이 법'도 만들어질 예정입니다. 정신질환이 있어 수업이 어려운 교사는 강제로 휴직시키겠다는 게 핵심인데요.
매번 한 발씩 늦는다 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2019년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민식이 가 교통사고로 하늘에 갔을 때도, 2020년 영양실조에 걸린 정인이 가 아동학대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제야 부랴부랴 움직였으니까요.
우리는 분명 부족합니다. 지극한 현재에 발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릅니다(하늘이 아버지 기자회견 질의응답 中 "제가 출근을 좀 빨리해서 7시에 나가는데 항상 6시 40분에 일어나서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손을 흔들고 있어요. 그날도 그게 마지막일 줄은 저도 몰랐어요. ").
봉준호 감독님의 말마따나 '완벽한 히어로' 는 세상에 없습니다. 어찌저찌 굴러가는 핸드폰 처럼 오늘 각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경고 신호 를 조금만 더 미리 알아챌 수 있다면, 더 촘촘하게 여과할 수 있는 법과 제도 를 만들어 놨었더라면.. 그런 아쉬움들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사회 변화의 충분조건이 목숨 이라니. '목숨마저 걸어야 바뀌는 사회' 를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 할까요.
🕯️ 곡절을 담은 언어 출처 : unsplash 물론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목숨마저 걸었지만 바뀌지 않는 사회를 지켜봐야만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전광훈 씨는 유튜브 를 통해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한다. 역사를 도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5·18을 평가절하했습니다.
우리나라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이 있습니다. 그 법에 쓰여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정의) “5·18 민주화운동”이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운동
정확하게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항'한 게 5·18 민주화운동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법을 만든 이유(제정 사유 )도 보시죠. 3년 전에 법제처가 직접 작성한 글입니다. '슬픈 역사를 왜곡/날조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을 더 강하게 처벌'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슬픈 역사임. 그러나 4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5·18 민주화운동을 비방하고, 폄훼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ㆍ날조함으로써 국론 분열을 조장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들이 있음.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왜곡은 희생자와 유족 등에게 단순히 모욕감을 주거나 그 명예를 훼손하는 것을 넘어, 잘못된 역사인식 전파와 국론 분열이라는 더 큰 사회적 파장으로 이어질 수 있어 일반 법률보다 더욱 강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음. 이에 이 법의 목적과 5·18 민주화운동의 정의를 보다 명확히 하고,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의 진행 정지를 명시하며,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국론 분열을 방지하고 5·18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의 역사로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도록 하려는 것임. <법제처 제공>
목숨으로 민주주의를 안착시켜 놓았는데, 이걸 역행하다니요. 어디서 배웠냐뇨.
그럼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가르치는지까지 설명해보죠.
대학에선 "어느 찬란한 언어로도 5.18 민주화운동의 곡절을 그리기 어렵다" 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남대학교 홈페이지 에 게재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입니다(누가 전남대 홈페이지까지 들어가 봐? 제가요.).
5월 17일 저녁은 불길한 예감으로 무척 어수선한 시간들이었다. 전국에 걸쳐 비상 계엄령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 흉흉한 상태에서 날이 밝았고, 1980년 5월 18일, 그 길고 긴 하루는 온통 탄식과 신음으로 얼룩졌었다. 역사의 거대한 음모가 전남대와 광주의 하늘과 땅을 뒤흔들며 피 냄새를 뿌렸다. 항쟁 나흘째인 1980년 5월 21일은 사월 초파일, 곧 석가 탄신일이었다. 이날 정오, 금남로에선 시위 군중들을 향한 무장 군인들의 집단 발포로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그것을 ‘피의 수요일’이라고 부른다. 그날 오후부터는 공수부대와 시민군들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탈취한 탱크와 버스, 그리고 트럭들로 무장한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집단발포에 따라 주검을 딛고 넘어 계엄군의 그 최후 저지선을 무너뜨리면서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몰아내고 도청을 접수하게 되었다. 27일 새벽, 한 청년이 눈물을 주먹으로 씻으며 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장내는 숙연해졌고,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던 고등학생들은 흐느껴 울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광주 시내 전 지역을 돌며 계엄군의 진입을 알리는 급박한 가두방송이 울렸다. 가두방송에서 울리는 당시 홍보요원이었던 박영순의 처절한 음성은 광주시민들의 가슴을 오래도록 저미게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일어나서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 시민들은 비굴할 수밖에 없는 무거운 침묵으로 날을 밝혀야 했다. 27일 아침, 시내는 조용했다. 모든 거리가 죽은 듯이 조용했다. 공수부대의 군인들은 도청 앞에서 아침 햇빛도 찬란한 시민군들을 토벌한 승리의 군가를 우렁차게 불러 재꼈다. 이 공수부대 군인들의 참혹한 승리의 그늘에는 말할 수 없는 굴욕과 비참이 핏덩어리보다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광주였고, 용봉골의 전남대학교가 겪어야 했던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스러운 침묵이었다. 아마 우리는 어느 찬란한 언어로도 그 곡절을 그리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 역사에서 우리는 5·18 광주항쟁만큼 절박한 심정에 비견될 수 있는 과거를 갖고 있지 않다.
한강 작가가 강연 에서 던졌던 질문을 여전히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들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 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이후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실제로 과거가 현재를 돕고 있다고,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하고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다. 이따금 그 묘지에 다시 찾아갔는데,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날이 맑았다. 눈을 감으면 태양의 주황빛이 눈꺼풀 안쪽에 가득 찼다. 그것이 생명의 빛이라고 나는 느꼈다. 말할 수 없이 따스한 빛과 공기가 내 몸을 에워싸고 있다고. 열두 살에 그 사진첩을 본 이후 품게 된 나의 의문들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종에 속한다는 사실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의 참혹과 존엄 사이에서, 두 벼랑 사이를 잇는 불가능한 허공의 길을 건너려면 죽은 자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두 질문 사이의 긴장과 내적 투쟁이 내 글쓰기를 밀고 온 동력이었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첫 장편소설부터 최근의 장편소설까지 내 질문들의 국면은 계속해서 변하며 앞으로 나아갔지만, 이 질문들만은 변하지 않은 일관된 것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