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그을린 달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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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llreview

금주의 한-탄

검게 그을린 달력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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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셋째 주]

(20241014 주간 경향發 홍진수 편집장 <가상의 독자에게 말을  붙여보니> 中)

제 글은 깁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다수 독자는 제 글의 길이만큼 넓은 아량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길이를 줄일까 고민해 봤지만 곧 단념했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말마따나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시는 소중한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어떤 글을 써야 할까 통 감이 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충혈된 눈을 붙들고 오늘의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살아간다'는 깊은 진실


출처 : unsplash

지난주, 한강 작가의 <매일경제> 인터뷰(20241010 매일경제發 <[한강 단독 인터뷰] 심장 속, 불꽃이 타는 곳 그게 내 소설이다>)는 주목해 볼 만합니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에도 기자회견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치열하고 날마다 주검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겠느냐'는 이야기만 전해졌는데요(20241011 한국일보發 <기자회견 결국 안 하는 한강..."전쟁서 날마다 사람 죽는데 무슨 잔치에 회견이냐">). 하지만 노벨상 수상 직전 때마침 진행 중이던 <매일경제> 인터뷰가 단독으로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그 내용 중 일부입니다.

한강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는 건 '정말 깊은 진실'입니다.

산다(live)는 게 뭘까.
(자, 생각할 시간입니다. 5, 4, 3, 2, 1. 땡!)

전 오래전부터 때때로 이 생각을 했습니다. 성탄절인 12월 25일(수)까지 '붉게 타오르는 쉬는 날' 없이 '검게 그을린 달력'을 보면서 '나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조졌다.

압도적으로 단순한 삶


출처 : unsplash

벌써부터 2024년과 이별할 결심을 합니다. 한 살 더 먹을 각오입니다. '무슨 유난이냐' 싶으시겠지만, 그런 각오도 없이 맞는 새해는 꽤 서글프더라고요.

존 윌리엄스의 책 <스토너>엔 그렇게나 '깊은 진실'에 대응하는 해답이 나옵니다.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단순함. 살아가는 건, 그래서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간다는 건, 누군가에겐 비정할 만큼 단순합니다. 그러다가 쉽게 늙어가죠. 정세랑 작가의 <피프티 피플>에 나오는 이야기처럼요.

혹시 지금도 의미 없이 주사위를 굴리고 있나요. 어떻게든, 한껏, 멀리, 돌을 던지고 있나요. 앞으로 성탄절까지 던져야 할 주사위와 돌들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의미 없는 빠른 삶


출처 : unsplash

하지만 삶의 의미 없음이 '느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의미 없는 빠름'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흉흉하게 돌던 2016년에 출간된 조한혜정과 엄기호의 책 <노오력의 배신>에 의미심장한 말들이 수두룩한데요. 그중 일부입니다.

10년이 지났습니다. 역시나 대한민국 현실(20240119 중앙일보發 <[안태환의 의학 오디세이] 아다지오의 미학>)은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악한 삶'을 느리게 희석합니다


출처 : unsplash

이동진 평론가는 이런 삶의 문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바쁜 건 악에 가깝다.

그렇다면 '바쁘다 바빠 한국 사회는 악에 가깝'지 않나요. 대한민국만큼 우악스러운 삶을 전 세계 또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김송희 편집장(20241001 빅이슈發  <나는 앞으로 몇 번의...>)처럼, 전혜원 기자(20241012 시사IN發 <전혜원 기자의 편지>)처럼 생각해보는 일뿐입니다.

오늘 하루를 온전히 소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쉬는 날 없이 달려야 하는 달력을 바라보며 모든 것들을 천천히 음미합니다. 되직한 삶을 희석시켜서 그 농도를 낮춰봅니다. 허지원 교수님의 글(20240202 중앙일보發 <[허지원의 마음상담소] 그 일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을 읽고 오늘 밤을 다시 서랍 속에 집어넣습니다. 

다시, 내일의 출근길을 힘차게 준비해야겠습니다.


이번 주에 길어 올린 사족은 영화 <최악의 하루>에서 은희(한예리)가 느지막이 내뱉는 독백입니다. 이 장면을 오랫동안 곱씹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최악의 하루 스틸컷)

아, 이 영화의 끝맺음을 걱정하지는 마세요. 이런 대사로 끝나니까요.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