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알은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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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 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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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둘째 주]

이원하 작가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에 나오는 시 '말보단 시간이 많았던 허수아비'입니다.

고선경 시인이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완연한 가을 날씨입니다. 말마따나 심란했던 여름은 죽었고, 발전된 가을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듬더듬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글은 아름답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 대전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한글은 아름답다는 것.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체불가능합니다. 고유의 맛이 있기 때문이죠.

대표적인 예시가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입니다.

조지훈 시인의 아들은 조태열 현 외교부장관입니다. 조 장관은 영문으로 번역된 아버지 시집에서 <승무>가 빠진 이유를 바로 이 '나빌레라' 때문이라고 말했는데요.(20190923 조선일보發 <70년 2代에 걸친 번역… 영어로 울려퍼진 조지훈의 詩>)

"버터플라이(butterfly)라고 번역할 수도 없어 참 난감"했고, "그만큼 한국 정서를 영어로 옮기기 어려웠다"고 털어놨습니다. 직계혈통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아름다움의 결정체'랄까요.

조의연, 이상빈의 책 <K 문학의 탄생>에는 이런 예시도 나옵니다.

'사뿐히 즈려밟다'라는 문장에 담긴 힘을 그대로 전달하면서 온전히 번역해 내기란 쉽지 않나 봅니다.

'무엇' 이전에 '왜'


학창 시절에라야 배웠던 온갖 아름다운 단어들을 소환한 이유가 있습니다.

매년 한글날이 되면 '학생 문해력 저하' 기사들이 쏟아집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멍청한 애들이 이렇게나 많아요!'라는 주장이었죠.

20241007 연합뉴스發 <'시발점'이라고 하니 "왜 욕해요?"…학생들 문해력 부족 심각>
20241007 조선일보發 <“족보는 족발보쌈세트” “두발은 두 다리”... 교사 90% “학생들 문해력 심각”>
20241007 국민일보發 <“세로 서 있는데 왜 가로등?” 교사들 놀래킨 아이들 문해력>

굉장히 게으른 기사입니다. 매년 학생들이 내놓는 황당한 대답들만 달라질 뿐, 나머지 내용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문해력 관련 최근 3년 치 기사들을 보시죠.

20231006 아시아경제發 <"글피·심심한 사과, 무슨 뜻이죠" Z세대의 솔직고백>
20221010 KBS發 <‘지구력’ 방어하는 힘?…“읽어도 뜻 몰라”>
20211008 매일경제發 <"사흘이 4일 아닌가요"유튜브에 익숙한 2030세대 한글 능력 떨어져>

이쯤 되니, 내년 한글날에는 '또 어떤 신박한 단어와 해석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할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대 갈라치기, 무비판적인 보도자료 인용 관행 등 '할말하않'입니다.

정리하자면, 핵심은 '무엇'이 아니라 '왜'입니다. '아이들의 문해력이 떨어지는 게 왜 중요한지' 고민이 빠져있습니다. 이 내용을 독자(혹은 시청자)들이 왜 알아야 하는지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박재영,이재경,김세은,심석태,남시욱(관훈클럽 저)이 쓴 <한국 언론의 품격>은 정확하게 그 지점을 꿰뚫어 비판하고 있습니다.

참 답답한 한글날이 될 것 같습니다. 컬럼비아대학 저널리즘스쿨 입구에 쓰여있는 소개문에 더 공감했습니다.

아름다움 알은 다음


그러니 '반대로 생각해보기' 를 제안합니다.
'알은 다음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름다움 알은 다음'으로 프레임을 바꿔보자는 겁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먼저 알려주는 건 어떨까요.

예를 들어, 김영하 작가가 유퀴즈에 나와서 "짜증난다"는 말을 금지시킨 이유를 함께 보시죠(20220518 tvN 유퀴즈 <김영하가 '짜증'을 금지한 이유(X) 감정을 섬세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O)>).

올리버 존슨은 <수학의 힘>에서 "수학의 본질은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지금 '정반대 역량'이 필요한 건 아닐지. '짜증' 같은 몇 개의 마법 같은 단어들을 집어 던져 버릴 때가 아닐지. 우울감을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나빌레라'를 다시 소환해야 하는 건 아닌지.

최소한 기자들이라도 '마법 같은 형식'을 벗어던졌어야 하지 않을지 한-탄해봅니다.


출처 : unsplash

제 스스로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한, 금주의 사족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