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대이동’이 말해주는 것 👗👔
작성자 고슴이의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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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대이동’이 말해주는 것 👗👔

주요 패션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의 임명과 해임, 이동이 패션계의 주요 뉴스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2024년과 2025년에는 다들 무슨 일이라도 있는 듯이 많은 이동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지금 누가 어디에 있는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이러한 이동이 뉴스가 되는 건 CD 교체가 브랜드의 기존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내고 굉장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동이 이뤄지고 있는 지금은 CD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현 패션 사업 모델이 정점으로 향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과연 이런 모델이 앞으로도 유효할지 시험대에 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대이동

일단 올해 새로운 브랜드로 데뷔하는 디자이너들이 있습니다. 알렉산더 맥퀸에서 오랜 기간 일했던 사라 버튼(Sarah Burton)은 매튜 윌리엄스(Matthew Williams)가 떠난 지방시를 맡았고, 얼마 전 파리 패션위크에서 첫 컬렉션을 공개했습니다. 보테가 베네타에 있었던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는 샤넬을 맡게 되었습니다. 30년 넘게 샤넬을 이끌던 칼 라거펠트 사후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가 브랜드를 이끌었지만 이번에는 5년 만에 물러나면서 샤넬은 다시 한번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공석이 된 보테가 베네타의 CD 자리에는 카르벤의 부활을 만든 루이스 트로터(Louise Trotter)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카르벤은 마크 토마스(Mark Thomas)를 임명했죠. 드리스 반 노튼(Dries van Noten)이 작년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생긴 빈자리에는 줄리안 클라우스너(Julian Klausner)가 임명되어 올해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에디 슬리먼(Hedi Slimane)이 맡고 있던 셀린느는 마이클 라이더(Michael Rider)가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캐나다 구스의 CD로 들어간 하이더 아커만(Haider Ackermann)은 톰 포드의 CD도 맡게 되었습니다. 메종 마르지엘라는 글렌 마르탱(Glenn Martens), 블루마린은 데이비드 코마(David Koma)가 이끌게 됩니다. 루크와 루시 마이어(Luke & Lucie Meier)가 떠난 질 샌더에는 발리에서 일하던 시몬 벨로티(Simone Bellotti)가 들어왔습니다.
보다시피 CD의 이동은 연쇄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몇몇 브랜드에서는 이미 유명한 디자이너들이 자리를 채워갔고, 또 지금까지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디자이너들이 발탁된 경우들도 있습니다. 셀린느를 나간 에디 슬리먼, 펜디와 디올 남성복을 떠난 킴 존스(Kim Jones), 여러 소문이 돌고 있는 로에베의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 메종 마르지엘라를 나간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25년 만에 발렌티노를 떠난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Pier Paolo Piccioli) 등이 앞으로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가 떠난 후 CD 자리가 비어 있는 구찌 같은 브랜드도 있죠. (이 글을 쓰는 동안 발렌시아가의 뎀나가 구찌를 맡게 되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조나단 앤더슨도 결국 로에베를 떠났고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브랜드의 얼굴이 되다

CD의 이동이 이렇게 중요한 패션계 이슈가 된 이유를 생각해 보기 위해 시간을 좀 앞으로 돌려봅니다. 예전에 고급 디자이너 패션이 처음 생겼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이건 말하자면 디자이너가 자기 이름을 앞에 건 고급 양장점, 양복점을 오픈한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찾아오는 고객들이 그 사회의 귀족이나 기업가 등 유력 지위층이었고 옷도 아주 비싼 가격이었으니 그저 평범한 가게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시절의 드레스 메이킹은 도제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었고, 디자이너가 은퇴하거나 세상을 떠나면 후임자를 임명하거나 아니면 그대로 사라지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세계 대전이 끝나고 경제 성장기가 찾아오면서 고급 패션 산업도 큰 발전을 하고 시장이 넓어집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샤넬, 디올, 구찌 같은 브랜드들은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어서 굳이 자기들이 고급 제품을 만든다고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이름을 알리고 거기에 고급의 이미지를 넣는 데 드는 막대한 비용을 생각하면 창립자가 없다고 브랜드를 없애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마케팅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오래된 브랜드는 또한 손쉽게 낡은 구시대의 표식이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브랜드의 이미지를 신선하게 유지해야 하고,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때 새로운 CD를 임명해 새로운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건 좋은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거대 자본이 여기에 힘을 실어줄 수 있죠.
고급 브랜드들의 이합집산도 중요하게 고려할 부분입니다. 케링(Kering)이나 LVMH, 카프리(Capri) 같은 거대한 패션 집단 회사가 등장해 디자이너 하우스를 계속 사들이고 포트폴리오를 정교하게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발렌시아가, 보테가 베네타, 구찌 등을 가지고 있는 케링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브랜드들이 서로의 경쟁자가 되어 매출을 까먹지 않도록 조율과 조정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보이는 패션과 이미지, 가격대와 구매층 등에서 조금 더 명확한 타겟을 가지고 시장에 대처해 나가게 됩니다. CD도 그러한 포지셔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도 생각해봅시다. 예전처럼 자기 이름으로 브랜드를 런칭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패션을 선보이며 은퇴의 그날까지 가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그 한계도 자명합니다. 거대한 네임 밸류를 가진 브랜드들 틈 사이에서 이름을 보존하는 것도 쉽지 않고 홍보를 위해 쓸 수 있는 자금의 차이는 너무 큽니다. 차라리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주는 거대 회사의 유력 브랜드 CD로 들어가 대자본을 활용하는 게 훨씬 나은 길입니다.

CD의 역할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패션 브랜드는 패션을 넘어서 라이프스타일을 총괄하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옷과 구두, 가방뿐만 아니라 뷰티, 인테리어, 가구, 음악, 영화 등 유형과 무형의 제품까지 내놓고 있는 상황에서 전체를 공통된 이미지로 통제하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의류 제작 기술의 발전과 탄탄한 제조 기반은 꼭 패션 디자이너가 아니어도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일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줍니다. 덕분에 이제는 패션 디자이너 외에도 뮤지션, 셀러브리티, 잡지 에디터, 사진작가 등이 패션 브랜드의 CD를 맡는 일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상황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며 패션은 임명직 CD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CD는 브랜드의 얼굴로서 하나의 패션 브랜드가 과거와 이별하고 새로운 챕터에 접어들었으며, 여전히 신선하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이름을 활용하고, 브랜드가 늙어가는 걸 막으면서 새로움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오묘한 문제들이 몇 가지 생겨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브랜드 존 갈리아노에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없고 다른 사람이 CD를 맡고 있습니다. 정작 존 갈리아노는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CD를 맡고 있고요. 이런 경우에 존 갈리아노 컬렉션은 존 갈리아노인가 아니면 메종 마르지엘라가 존 갈리아노인가 하는 등의 혼란이 생깁니다. 이와 연결된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예컨대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óbal Balenciaga)가 만드는 발렌시아가와 뎀나 바잘리아가 만드는 발렌시아가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뎀나 바잘리아가 만드는 새로운 패션에 발렌시아가라는 이름이 정말 필요할까요?
이런 문제 때문에 최근 임명된 CD들은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들의 아카이브를 가져다 놓고 재해석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존에 붙어 있던 이름과 아무 상관 없는 새로운 컬렉션을 만들어 내는 건 특정 브랜드의 CD라는 직무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특히 브랜드의 오랜 고객 입장에서는 네 맘대로 하는 건 네 이름으로 브랜드 런칭해서 하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재해석은 여러모로 안전한 접근입니다.
하지만 이걸 달리 보면 브랜드가 거대 자본을 쥐어주는 대신 패션 디자이너의 창조적 범위를 좁히는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최근의 패션이 계속 과거의 재해석에 몰두하고 있는 건 의복의 영역에서 완전히 새로운 게 나올 게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도 있겠지만, 거대 브랜드의 임명직 CD가 갖는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중심 체제는 지속될 수 있을까

CD를 통한 패션 리더십의 교체는 어떤 한 브랜드의 패션에 굉장히 광범위한 영향을 미칩니다. 성공적인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구찌는 위기의 순간 톰 포드(Tom Ford)나 알레산드로 미켈레(Alessandro Michele)처럼 의외의 CD를 발탁해 힘을 실어줬고, 완전히 새로운 구찌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상업적 성과도 대단했습니다. 물론 실패한 사례도 많이 있습니다. 최근만 봐도 구찌의 사바토 데 사르노, 톰 포드의 피터 호킹스(Peter Hawking) 같은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패션을 미쳐 제대로 펼쳐 보이기도 전에 브랜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최근의 상황을 둘러봅시다. 구찌 같은 브랜드가 CD를 교체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고, 스타 디자이너나 그냥 정말 스타(셀러브리티)가 브랜드를 맡으며 언론 보도와 관심이 집중되자 다들 이 모델을 채택하기 시작했습니다. CD 한 사람에게 큰 힘을 실어준 다음 성공하면 득이고 실패하면 교체하는 식입니다. CD에게는 짧은 기간과 매출의 급성장이라는 비현실적인 목표가 주어지고 들어올 때는 대대적인 찬사가 쏟아지지만 성적이 좋지 않으면 가차 없이 교체합니다. 프로스포츠 팀 감독과 비슷하게 패션 브랜드의 CD는 매출 하락의 책임을 짊어질 좋은 타깃이 됩니다. 괜찮은 성과를 낸 CD는 컬렉션, 협업, 다른 브랜드 겸업, 캡슐 컬렉션 등으로 끊임없이 업무가 가중됩니다.
현 CD 체제의 문제점 중에는 성별과 인종 편향성도 있습니다. 소비자 층은 인종, 성별, 나라를 뛰어넘으며 넓어지고 있는데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 루이 비통 남성복의 퍼렐 윌리엄스(Pharrell Williams), 캘빈 클라인이 컬렉션 라인을 부활하면서 임명한 베로니카 레오니(Veronica Leoni)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유력 브랜드 대부분의 CD는 백인 남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패션의 편협한 시각과 모순적 세계관이 반복되고, 결국 패션이 지지부진해지는 이유를 여기서 찾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더 큰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크게 성장하던 럭셔리 패션 산업에 마침내 침체의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주요 브랜드의 매출 증가율은 지지부진하고 미래는 불투명해지고 있습니다. 성장하던 시기에 럭셔리 업계는 가격을 어디까지 올려도 시장이 소화해 낼 수 있는지 테스트를 해보는 것처럼 끊임없이 가격을 올렸습니다. 그런 덕분에 지난 몇 시즌이 지나가는 동안 딱히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옷과 가방의 가격이 2배 이상 올라버린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거의 모든 브랜드들이 CD 교체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당장 신제품을 들고 올해와 내년의 시즌 컬렉션을 선보여야 하는 브랜드 입장에서는 다른 걸 둘러볼 여유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체가 마무리되고 올해의 컬렉션이 치러지고, 그 결과가 나오면 과여 이 모델이 과연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검토가 이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지금은 다음의 균형을 향해 가는 혼란의 상황입니다. 이제 누군가 새로운 방식을 들고나오고 그게 성공을 거두면 또 다들 우르르 따라 하겠죠. 패션 산업이란 대체로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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