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기억의 건축물을 복원하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기억의 건축물을 복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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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책수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기억의 건축물을 복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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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_usj73co6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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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소설을 왜 읽으시나요?

저는 소설 속 인물들의 기억과 경험의 공간 안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를 배웁니다.
마음에 와 닿은 소설을 읽고 난 후 주위를 둘러보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막 정류장을 떠나려는 마을버스 뒤꽁무니를 부지런히 쫓아가는 직장인은 어떤 희망과 기다림으로 저런 힘을 내는 걸까요? 편의점 앞 간이 탁자에 잠시 피로함을 내려놓고 쉬고 계시는 어르신은 어떤 삶의 굴곡을 건너 오신 걸까요? 삼삼오오 걸으며 까르륵 밝은 소음을 내는 학생들의 웃음소리에 담긴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요?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김금희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 속 개인의 기억, 사연에 대한 이 한 문장이 저의 소설 읽기의 명분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창경궁 대온실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중심으로, 개인의 상처와 역사의 아픔이 교차하는 지점을 섬세하게 포착한 이 소설은 기억의 복원과 치유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이야기의 시작: 수리 보고서와 마주한 영두

소설은 30대 여성 영두가 창경궁 대온실 보수공사의 백서를 작성하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강화군 석모도 출신인 영두는 중학생 때 창경궁 인근 원서동의 '낙원하숙'에서 지냈습니다. 하숙집 주인 문자 할머니와 그의 손녀 리사와 함께 생활했던 경험과 그 시절의 아프고 억울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작성이라는 업무는 영두에게 단순한 기록 작업이 아닌,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계기가 됩니다.

시간을 넘나드는 서사: 세 개의 시선

작품은 1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아우르며 세 개의 시점을 교차시킵니다. 현재의 영두가 대온실 보수공사를 기록하는 시점, 20년 전 영두의 중학생 시절, 그리고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시대입니다. 이 세 시간대를 오가는 서사는 마치 대온실의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서로를 비추며, 시간의 겹을 통해 더욱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대온실: 역사와 개인이 만나는 장소

창경궁 대온실(사진출처:문화재청)

창경궁 대온실은 이 소설의 중심 소재이자 상징적 공간입니다.
1909년에 건설된 이 건물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유리온실이자 동양 최대 규모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일제강점기의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대온실을 통해 역사의 연속성과 단절, 그리고 복원의 의미를 탐구합니다. 대온실은 일제에 의해 훼손된 창경궁의 일부이면서도, 1983년 창경궁 복원 과정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입니다. 이는 역사의 아픔을 간직하면서도 현재와 공존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특히, 작품의 후반부에 밝혀지는 문자 할머니의 사연 속 상처와 부조리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든것 처럼 아픕니다.

기억의 복원과 재구성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기억의 복원과 재구성 방식입니다. 영두는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합니다.

이 과정에서 영두는 자신의 기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사실의 두께를 더해갑니다. 마치 대온실이 물리적으로 수리되어 가듯이, 기억도 하나의 건축물처럼 시간과 공간을 통해 완성되어 갑니다.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근본적으로 상처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두의 개인적 상처,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상처, 세대 간의 단절로 인한 상처 등 다양한 층위의 상처들이 작품 속에 존재합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러한 상처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두가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고 치유해가는 과정은 곧 역사적 상처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과정과 맞물립니다.

섬세한 문체와 구조

김금희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섬세한 문체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어떤 정념에도 붙들려 있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기력이나 냉소에 함몰되지도 않는, 이 초연하고 성숙한 힘"으로 평가받는 그의 문체는 이 작품의 무게를 더합니다.

창경궁과 대온실이라는 공간의 묘사와 인물의 심리가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듯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이러한 섬세한 묘사는 대온실이라는 공간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 느끼게 만듭니다.

역사소설의 새로운 가능성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김금희 작가의 첫 역사소설이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역사소설과는 다른 접근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개인의 삶과 기억을 통해 역사를 바라봅니다.

이러한 접근은 역사를 더욱 생생하고 친근하게 만듭니다. 독자들은 영두의 개인사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근현대사를 마주하게 되고,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공감을 얻게 됩니다.

독자들의 감상평 중에는 일본 패망 이후 "체류 일본인"에 대한 시선이 너무 감상적으로 접근한 점에 있어 역사적으로 불편했다라는 의견도 보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문자 할머니 즉 어린 시절 "마리코" 또한 일본 제국주의 시스템의 피해자라고 볼 때, 보편적인 인류애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할머니의 사연 속에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 역사의 부조리가 안타까웠습니다.

현재성을 가진 과거의 이야기

이 소설이 가진 또 하나의 강점은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대온실이라는 공간은 과거의 상처를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역사가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줍니다. 과거의 상처는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있으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치유해 나갈 것인가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가 됩니다.


리뷰를 마치며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역사소설이나 성장소설의 범주를 넘어섭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기억과 역사, 상처와 치유, 그리고 세대 간의 소통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특히 대온실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통해 과거와 현재, 개인과 역사가 어떻게 만나고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해낸 작가의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작품의 말미에서 영두가 발견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소설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방식, 그리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법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기억은 시간과 공간으로 완성하는 하나의 건축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문장처럼, 우리도 각자의 기억이라는 건축물을 끊임없이 수리하고 복원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우리가 함께 써나가야 할 보고서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