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윤리도, we all 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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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윤리도, we all lie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최소한의 윤리란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여겨지는 도덕적 기준이다. 살인을 하면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하면 안 된다, 남의 재산을 훔치면 안 된다, 남을 괴롭히면 안 된다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 기준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시대와 문화, 법과 사회적 합의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노예제, 인종차별, 남녀차별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이러한 것들이 최소한의 윤리를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윤리는 현실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적용될까? 머리로는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돈, 교육, 입시, 가족, 미래 같은 단어가 결부될 때 이상하게도 그 기준은 쉽게 왜곡된다.
윤리의 경계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한서진의 교육 방식은 ‘최소한의 윤리를 지속적으로 허무는 과정‘이다. 표면적으로는 예서가 스스로 공부했으므로, 엄마의 강요가 없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생 예빈의 경우는 다르다.
예빈은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놀이’를 즐긴다. 이를 알게 된 한서진은 편의점에 물건값과 추가 금액을 지불하며 법적 책임을 지우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친다 해도 ‘훔치는 놀이’라는 기괴한 장난은 윤리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만 문제없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합리화가 ‘감당할 수 없는 공부 스트레스’와 결합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최소한의 윤리를 뒤흔든다. 결국, 학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는 이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 자식을 위해 노력하는 한서진의 입장에 서서 그 현실을 이해한다.
이렇게 못 본 척 하며 무너뜨린 윤리적 기준 하나로 세상이 즉각적으로 무너지지는 않지만 그 기준을 회복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최소한의 윤리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극 중 이수임은 스카이캐슬의 파괴자로서, 우리가 잊고 있던 윤리적 저항선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사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책을 억지로 읽게 하는 독서 모임이 학대라고 주장하며, 입시 코디가 학생과 가정을 파괴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드라마 시청자들이 가장 미워했던 캐릭터가 이수임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좋은 말이나 하는 교조적인 인물’처럼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한서진의 입장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여긴다. 원하는 대학을 위해 이웃의 죽음과 관련된 사람을 아이의 입시 코디로 고용하는 것에 눈감고, 포트폴리오를 위해 받는 특혜를 정당한 성취로 여기며, 한서진이 고등학생 혜나의 멱살을 잡고 협박할 때조차 ‘그러니까 혜나가 좀 작작했어야지’라고 현실에 맞춰 생각한다.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선택을 하면 손해를 본다고 믿고,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만 적어도 현상 유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현실적 대처는 회피나 상황 모면에 불과하며, 이 과정에서 윤리적 저항선은 자주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그 저항선을 넘었을 때 느끼는 불편함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윤리적 기준이 흔들릴 때 그 저항선을 더욱 낮추기 위해 더 나쁜 결정을 하거나, 자신보다 더 낮은 기준을 가진 사람을 보며 ’저건 진짜 너무하네‘라며 합리화한다.
이 드라마는 많은 학부모에게 어느 정도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윤리는 누구의 것인가?
한서진이 윤리적 선을 넘을 때마다, 예빈의 일침은 서진을 정신 차리게 만든다.

‘훔친 시험지로 백점 맞으면 되는 걸, 학원은 왜 가?’
예빈의 이 말은 한서진이 스스로 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마지막 저항선조차 이미 무너졌음을 상기시킨다.

혜나를 살해했다는 법적 판결이 없었다면, 김주영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그녀의 행동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더 나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살인과 시험지 유출이 동시에 벌어진 상황에서도 한서진이 입시 코디를 유지하려 한 선택은 ’나였어도?‘라는 질문을 가져왔다.
나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최소한의 윤리’가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것이 자주 논쟁의 대상이 된다.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이 타인에게는 당연하지 않고 쉽게 무시될 때, 나는 ‘최소한의 윤리라는 게 원래 없나?’라는 혼란과 좌절을 느낀다.
드라마를 보는 나와 현실 속의 나는, 그렇게 계속 다퉜다.
윤리는 어디까지 타협될 수 있을까
드라마의 결말을 보며 혹시 반전이 있을까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무난한 결론과 캐붕을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더 충격적인 결말이 나왔다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감정적으로 한서진에 이입된 상태로 ‘입시와 아이의 미래를 위해 부모로서 이 정도까지 감당하는 게 찐 사랑’이라는 결말이라면, 드라마가 끝난 뒤 현실에서 훨씬 더 큰 찝찝함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불편한 일들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들이 쌓이면서, 최소한의 윤리는 점점 더 후퇴한다.
스카이캐슬이 보여준 건, 결국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윤리는 늪과 같아서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We all lie, tell you the truths..
드라마를 보며 부모들의 선택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 외에도 많은 시청자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이는 개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현실적 판단’ 때문인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그렇다면 최소한의 윤리를 지키는 것을 개인의 양심에만 맡겨도 되는 것일까? 최소한의 윤리의 찬반이 마치 대등한 듯 논쟁거리가 되는 사회에서, 윤리는 정말 개인과 가족의 몫으로만 남겨도 괜찮을까?
시대가 변하면서 윤리의 기준도 바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까지 쉽게 타협되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윤리적 저항선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지만, 그 기준을 다시 세우는 것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결국, 우리는 사회 안에서 우리 선택의 윤리적 책임에 대한 저항선과 저지선을 고민하고, 그것이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비판하고 성찰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