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삶이 '원래' 그럴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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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삶이 '원래' 그럴 리 없다

혼돈과 기적을 뜻하는 '가버나움'. 예수가 기적을 행했던 도시였으나, 회개하지 않은 결과 멸망하리라는 예언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곳. 그 이름처럼 혼돈 속에서도 기적을 찾아 나가는 소년 자인의 이야기.
수 년 전 방문한 레바논 베이루트는 마치 상처를 형상화한 곳 같았다. 내전의 흔적이 남은 빌딩, 벽을 가득 채운 그래피티,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놀랍도록 밝았지만, 그 밝음의 결이 달랐다. 단순히 희망적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하는 느낌? 그들은 말했다.
'눈 감는 게 무서워요. 악몽을 꾸거든요.'
'미래를 꿈꾼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내일이 올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래서 오늘 이렇게 놀아요. 어쨌든 지금은 여기 있으니까요.'
오직 오늘을 살아야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인.
베이루트에서도 더 깊고 보이지 않는 골목에서 태어난 아이. 부모가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들. 그들은 또 다른 아이를 낳고,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다른 상채기를 낸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일어나는 대로' 살아가는 삶
영화 속 삶은 '그저 계속되는 것'이었다. 행복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삶, 기대하지 않고 실망하지도 않는 삶. '더 나은 내일'만이 의미있다는 신념으로 한국에서 살아온 내가 오만하게 가치판단을 할 수 없는 삶. 영화 속 인물들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더 나은 내일?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자인의 부모에게 삶은 그저 주어진 것, 일어나는 것, 신의 뜻이었다. 그들은 신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내일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오늘을 그저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오만한) 내 눈에는 그저 '겨우 버티는 삶'으로 보였다.
이상하게도, 자인은 예외였다.
그는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가족의 경제적 상황보다 동생이 조혼으로 희생되는 것을 더 견딜 수 없어했다. 그리고 '나를 태어나게 한 죄'로 부모를 고소한다.
다른 삶을 꿈꾸지만 어떤 꿈인지 몰라

사회는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방치된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아이들, 시스템도, 부모도, 이웃도 돌보지 않는 아이들.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일터로 뛰어드는 아이들. 어른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때로는 이용하기도 한다.
아마 그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는 배운 적 없는 개념을 이해할 만큼 똑똑했다. '학교'가 왜 필요하지? '증명서'가 왜 필요하지? 본 적도 없는 곳, 스웨덴을 왜 동경하지? 어쩌면 그는 직관적으로 삶이 '이런 식으로' 계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태어나서 살아갈 뿐,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 속 어른들은 그와 다르게 주어진대로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은, 계속되기 때문에 계속될 뿐이다. 하지만 자인은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지 깨닫고 있었다. 그는 어른들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고 고난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부모에 의존하지 않았다. 대신 동생들을 보호했고,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언제나 먼저 챙겼다. 티게스트가 불법체류로 구금되었을 때도 요나스를 절대 홀로 두지 않았다. 어른들에게는 거칠게 맞섰다. 그들은 보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감옥 안에서 기도를 하지도 않았다. 주어진 환경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어, 부모를 고소하는 것으로 또 다른 가능성을 붙잡는다.
그에게 단 하나를 줄 수 있다면
자인은 자신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다. 그리고 그는 증명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자인은 그렇게 자신이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렇게 신분증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마치 영정사진 같은 표정만 짓던 그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그의 삶은 '존재'에서 '증명'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삶에 대한 그의 태도처럼, 살아지는 것(to be)이 아니라 살아가려는 의지(to exist)를 가진 존재로서.
모든 것이 결핍된 그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 돈, 음식, 집, 여러 가지가 떠오르지만, 결국 그가 원했던 대로 자신을 증명하는 삶이 아닐까. 부모 세대처럼 '신의 뜻'이라며 체념하는 삶이 아니라 '이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갖는 것. 이제 신분증도 생겼고, 그는 아마 교육을 받으며 자신이 알게 된 것들을 동생들도 알게 되기를, 그리고 부모들도 알기를 바랄 것이다.
이 영화는 절망이 아닌, 혼돈 속에서도 기적처럼 태어나는 작고 강한 가능성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한, 삶은 단순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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