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장애 깨부수기(4) 유형화와 오답노트

식이장애 깨부수기(4) 유형화와 오답노트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식이장애 깨부수기(4) 유형화와 오답노트

나나
나나
@naneunn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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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말했던 ‘강박의 역이용’이 사실 나 외에 많은 사람에게 권하기는 힘든 방법이었다면, 이번 ‘유형화와 오답노트’는 이 식이장애를 겪는 모두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

사실 식이장애를 겪다 보면 거식과 폭식이 좀 심해지는 순간이 오는데, 그럴 때는 대개 패턴이 있다. 이걸 한 발짝 떨어져 보면 유형화를 할 수 있고, 오답노트를 만들 수 있다. 식이장애 환자가 거식, 폭식하면서 본인이 거식, 폭식한다는 걸 아예 모르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당장 거식, 폭식이 차오르는 순간에는 그걸 제어하기 힘들 수 있다. 그치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거식, 폭식임을 알게 된다. 그 순간에 ‘내가 오늘 왜 거식했을까? 왜 폭식했을까?’를 분석해 보면 된다.

내 손은 1년 내내 부르텄다. 이 사진은 5월이다.

내 경우에는 일단 거식이 기본 상태였고, 폭식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짧으면 며칠에 한 번, 길어도 3주에 한 번은 반복됐다. 패턴을 분석해보면 결국 두 가지였다.

1) 거식이 누적되면 폭식한다

당연하다. 영양이 부족하니까 폭식을 한다. 내가 거식 기간 동안 얼마나 안 먹냐에 따라, 그 기간이 달라진다. 별다른 변수가 없는 경우, 먹는 양에 따라  2~3주간의 거식이 누적되면 폭식이 찾아왔다.

2) 스트레스를 받는 날 폭식한다

특정 변수다. 내 경우는 팀장이 큰 스트레스를 주는 날 주로 폭식을 했다. 상담선생님은 이걸 보고 내가 자해하듯 폭식하는 거라고 했다. 밖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폭식함으로써 풀고, 내 스스로를 폭식으로 괴롭게 해서 다른 정신적 스트레스를 잊으려고 한다고 했다.

이 날이다. 내가 은정이 앞에서 칼로리를 계산하고, 결국 은정이가 울었던 날. 그 날 먹었던 빵이다. 아픈 기억이고, 아픈 빵이다. 이제 즐겁게 이 빵을 먹으러, 다시 한 번 가야겠다.

이게 객관화되니까 폭식은 그래도 조금 쉬워졌다. 솔직히 1)의 경우는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치만 2)는 조금 쉬웠다. 누군가 나를 괴롭게 한다고, 내가 내 스스로에게 더 큰 고통을 주며 그 괴로움을 잊으려는 건 정말 역설적이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 폭식하는 걸 알면서도 이 패턴이 반복되는 날도 있었지만, 스트레스를 받은 날은 폭식할 거라는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에 폭식하지 않을 수 있는 여러 환경을 만들든, 더 조심하든 했다. 아예 일찍 잠들어버리기도 했다. 폭식할 시간 자체를 주지 않고 스트레스를 잊으려 했다. 아니면 방을 정리하는 것도 도움이 됐다. 환경이 지저분하면 폭식을 더 하게 된다는, 과학적으로 맞는 말인진 모르지만 유튜브 따위에서 학습한 거라도 지키려고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도 상기시키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폭식하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솔직히 거식은 오답노트를 만들기는 힘들었다. 기본이 거식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식은 이전 이야기에서 말했듯 그냥 먹는 양을 조금씩 늘려가는 걸로 했다. 대신 나는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나아지면 거식이 더 심해진다’는 유형화를 했기 때문에, 아주 조금씩 나아지는 걸로 나름의 오답노트를 만들었다.

내가 빵을 좋아하는 걸 아는 동네 친구가, 갑자기 내 생각이 난다고 밤 늦게 시간 맞춰 가져다 준 노티드 도넛. 서로 시간이 안 맞아서 정말 도넛만 전달 받고 헤어졌다. 나는 이렇게 사랑받는 사람인데, 왜 나는 스스로 나를 사랑하지 못했나?

이렇게 유형화를 하고, 오답노트를 만들고 나면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100%는 아니지만, 적어도 10번의 거/폭식 중 한 번이라도 피할 수 있는 거다. 그러면 됐다. 이 과정은 어차피 힘드니까. 유형화와 오답노트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틀을 만들어 준다. 처음에는 더디지만 이 객관적인 틀이 단기적 거/폭식 극복을 넘어 장기적인 ‘극복 근육’을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