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나에게 사과했다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남편이 나에게 사과했다
상담 초반에 선생님은 ‘가족이나 애인이 식이장애 극복에 걸림돌이 될까요?’ 물었다. 주변인이 나에게 살 빼기, 마른 몸 유지하기를 압박하냐는 것이었다. 이런 주변인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엄청나다고 했다. 실제 내 친구는 고등학생 때 매일 체중계에 올랐다. 엄마가 살에 대해 매일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지극히 정상 체중이다. 미디어적인 시선, 몸매에 대해 주어지는 ‘이상한’ 시선에서 봐도, 그 친구는 전혀 통통한 편도 아니다. 그런데도 엄마가 매일 살을 빼라고 압박했다고 했다. 칼로리도 늘 계산했다고 한다. 가족이 식이장애를 부른 셈이다.
다행히 나는 그 당시 상담 선생님에게 ‘아니요’라고 답할 수 있었다. 가족은 어차피 떨어져 살고, 데면데면한 상태라 연락도 잦지 않았다. 애초에 고향에 간지도 몇 년 된 상황이었다. 애인도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그리고 최근, 남편은 내게 사과했다. 요지는 이렇다.
요새 뉴닉에 올리는 글을 보다 보면, 내가 처음 운동하고, 무게를 잴 때가 생각난다고 했다. 그 당시에 본인도 사실은 왜곡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가치관이 내 식이장애에 영향을 줬을 것같다고 한다. 내가 운동하고, 사회적으로 말하는 ‘날씬함’에 가까워지는 걸 선호하고, 반겼던 것 같다고 한다. 내가 쓴 뉴닉 글에서도, 남편은 마른 몸 얘기를 하거나 감량을 압박, 유도하지 않는다고 했고, 실제로도 본인이 그런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은 맞다. 그러나 본인이 조금 더 올바른 가치관을가지고 있었다면, 내가 처음에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을 때 ‘60kg도 표준체중인데 굳이 안 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말렸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고 가만히 둬서, 그렇게 한 데는 본인의 그런 가치관과 마음이 영향을 준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이 소극적으로는 내 감량을 유도했고, 적어도 방치 또는 조장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본인이 식이장애의 원인이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막을 수는 있었는데 막지 못한 책임이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고,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식이장애로 이렇게 오랜 기간 고생하는 게 속상하고, 부조리하다고 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이 길든 짧든, 그 과정을 오롯이 함께 걸어가고, 본인이 온전히 함께 떠안으며 책임지겠다고 했다. 부끄럽고, 슬프지만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겠다고 했다.
마음이 아프고, 고마웠다.
사실 남편 말이 맞다. 남편이 내게 감량을 적극적으로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말릴 수도 있었겠지. 식이장애가 시작된 이후로는 거의 불가항력에 가까웠지만, 그 전에 말릴 수 있었겠지.
하지만 너무도 이해한다. 마른 몸, 날씬한 몸. 어릴 때 ‘착한 몸매’라는 단어가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떠 있었나, 기사로 나왔나. 그걸 보면서 ‘착한 몸매’가 뭐지? 나처럼 통통한 몸매라 남한테 살 빼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를 주는 몸맨가? 그런 이상한,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조차 편견 투성이인 생각을 하면서 ‘착한 몸매’의 뜻을 알아본 적이 있다. 소위 말하는 날씬하고 군살 없고,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몸. 그런 몸이었다.
꼭 그것 뿐만이 아니다. 여전히 미디어에서는 ‘몸매’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른 몸’에 대해 꾸준히 생각하게 하는 시선이 숨어 있다. 그래서 나도, 많은 사람도 이런 시선에 물들어 있다. 남편도 그랬을 거다.
그걸 인정하고, 사과해 준다는 게 고마웠다. 깨닫지 못할 수 있는 걸 깨닫고, 반성하고, 뭐 그게 고마웠다.
그치만 남편도 나도 이런 걸 깨닫지 않고, 사과하지 않고 더 행복했다면 참 좋았을 것을. 나와 남편 같이 무의식적으로 왜곡된 시선 때문에 생채기를 내고, 후에야 깨닫는 일은 없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