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ESFJ로 살았는데, 내가 ISTP라고?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10년간 ESFJ로 살았는데, 내가 ISTP라고?
MBTI를 처음 알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그 때부터 20대 후반까지, 내 MBTI는 변함 없이 ESFJ였다. 그런데 식이장애가 시작되고, 요새는 엄청 왔다갔다 한다. ISFJ가 꾸준히 좀 나오다가, 요새는 ISTP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E가 I로 바뀐 건 어쩌면 당연하다. 사람을 피하고, 사람을 만나면 스트레스를 받았으니까. 먹을 게 두려운 것도 있지만, 사람들이 걱정하는 말도 싫었다. E와 I가 사람을 통해 에너지를 받느냐 뭐 그런 차이라던데, 누군가 ‘말랐다’ 해도 싫고, ‘살 쪘다’ 해도 싫은 이상한 나였으니까 에너지를 받을수 있을 리 없다.
F가 T로 변한 건, 사람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서 그런 것 같다. 예전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만 봐도 울었다. 뭐, 그런 어른들이 많긴 하겠지만, 별별 거에 다 울었다. 친구가 취업에 성공해도 눈물이 났다. 근데 이 사태를 겪으면서 사람에 대한 기대를 많이 접었고, 감정도 조금 메마르게 됐다. 이건 요새 다시 돌아오는 것 같긴 하다.
J가 P로 변한 건, 사실 내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변화였다. 이게 ‘나나’로 살아갈 수 있는, ‘나를 나답게 만드는’ 변화기도 하다. J와 P가 꼭 이런 차이가 있는 건 아니고, 일반화는 금지다. 내 지극히 개인적인 케이스임을 미리 명시한다. 상담 선생님은 이런 류의 강박은 MBTI J인 사람에게서 많이 보인다고 했다. 흔히 우리는 ‘여행 계획 짜냐, 마냐’로 J와 P를 나누는데, 사실 J와 P의 차이는 통제다. 나는 거의 80% 내외로 J 성향이 강했는데, 오히려 여행 계획은 안 짰었다. 인생이 통제고, 여행 계획을 짰다가 내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싫어서. 대신 모든 해야 할 일정은 캘린더에 적고, 관리했다. 남편의 일정까지 내 캘린더에 적고 하나하나 체크했다. 이렇게 통제 성향이 강해서, 스스로를 통제하려다 강박이 찾아온다고 했다. 내가 나를 너무도 옥죄는 삶을 살았다. 뭐든 미리미리하고, 조바심 냈다.
진짜 웃긴 게, 다이어트 강박이 있으면 어떤 사람들은 가르니시아 등 다이어트 보조제를 찾기도 한다. 근데 나는 그런 보조제로 살을 빼면, 나중에 더 힘들 것 같고, 내가 보조제에만 의존할 것 같아서 먹지 않고 빼기로 정했다. 그러면 그 정한 건 절대 바꾸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실제로 남편이 뭔가 내가 힘들 때 조언을 하거나 도움을 주려 해도, 내가 정한 건 절대 안 바꾸기 때문에 사실 잘 듣지 않았다. 이게 남편이 내가 식이장애로 가는 과정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던, 어쩌면 그 스스로도 이 식이장애에 가스라이팅(?)을 당한 이유다. 우리 모두 이 식이장애를 인지하고 나서는 남편이 나에게 주기적으로 식이장애 극복 관련 제안과 조언을 했다. 예를 들면 걷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자든지, 식사량을 조금씩 늘린다든지. 나는 늘 한 번에 듣지 않았다. 남편의 말은 그냥 단순히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려주는’ 것처럼, 내가 스스로 결정했는데 식이장애의 이상한 압박과 두려움 때문에 실천을 못하고 있을 때, 그 때만 통했다. 내가 식이장애를 고민하고 있을 때, 윤정이가 상담 받으라고 하기까지는 아무 것도 못하다가 윤정이 말을 계기로 상담을 다녔듯이. 그래서 남편은 “내가 조언했을 때 바로 받아들이면, 이미 늦었나 싶다”고 했다. 나는 이미 내가 마음의 결정을 어느 정도 내려야 남의 말을 받아들이니까, 남편이 처음 제안한 걸 바로 받아들이면 이미 나는 마음 속으로 그 결정을 다 내리고, ‘뺨 때려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진짜 웃기고 슬프다.
물론 이건 최근 일이다. 내가 아직도 J, 통제 성향이 강하다는 거겠지. 그치만 가끔 P가 나온다는 건, 내가 그 통제를 조금 버리고 있단 뜻이다. 그래서 실제로 내 삶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뭐가 내 뜻대로 안 되면, 나와 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엄청 ‘동동’거렸다. 불안해하고 초조해한다는 거다. 때로는 진짜 너무 슬퍼서 울기도 했다.
어딜 가든 잘해야 했고, 미리 해놔야 했고, 완벽해야 했고, 틀어지면 안 됐다. 이제는 조금 못해도 되고, 조금 밀려도 되고, 하기만 하면 되고, 되는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려) 한다. 잘 안 되기도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삶이 조금은 윤택해졌다. 뭐, 잘하면 좋지. 근데 나 같은 사람은, 그 잘하려는 마음이 나를 너무 갉아먹더라. P로 변한 거? 오히려 좋다. 물론 내가 P라고 해봤자 사실 P인 척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이런 삶의 태도가 나는 좋다.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입니다. J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