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는데,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사실 아직도 완치(?)라고 하기는 어렵다. 내가 정신과를 계속 다닌 게 아니어서일 수도. 그렇게 내 식이장애는 희망과 절망을 오갔다. 다행히도? 처음 상담을 받고 난 뒤에는, 그렇게 사후 경직 같은 이상한 경험을 하고 난 뒤에는 급경사의 희망이 찾아왔다.
예전에 내 컴퓨터에는 이상한 파일이 있었다. 바로 칼로리 표다. 내가 그 날 먹을 것에 대해 늘 칼로리를 생각했다. 칼로리가 표시돼 있는 제품이면 당연히 그 칼로리를 적고, 그게 아니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았다. 돈까스 안심, 등심, 마라탕 200g, 케이크 등등.. 어차피 음식점에서 쓰는 재료나 조리법 등에 따라 칼로리가 다 달라질 건데도, 나는 미친듯이 칼로리를 찾았다. 그렇게 계산하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못했다. 아니면 먹고 집에 가서 울거나. 물론 계산하고 먹어도 우는 건 마찬가지긴 했다.
근데 이 칼로리 계산도 정말 말 그대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재료나 조리법에 따라 칼로리가 다를 거니까, 인터넷에 있는 그 음식의 가장 높은 칼로리를 상정한다. 레드벨벳 케이크 1조각이 몇 칼로리 할 것 같은가? 당연히 중량과 재료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가게마다도 정말 정말 다르다. 그래서 어떤 글을 찾으면 300kcal, 어떤 글에서는 500kcal, 어떤 글에서는 900kcal이라고 적어놨다고 가정하자. 난 그럼 900kcalx1.1을 했다. 내가 보지 못한 글에서 이것보다 큰 칼로리를 적어놨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나는 990kcal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누군가랑 그 케이크를 먹을 거니까, 반만 먹는다고 생각하면, 990kcal/2에서 또 이상하게 반올림을 한다. 내가 먹는 건 500kcal라 생각하는 거다. 그러고 실제로 당연히, 반을 못 먹는다. 바보.
이게 케이크로 예시를 들어서 그렇지, 제일 환장할 음식은 주로 고기류였다. 자꾸 돈까스 얘기를 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등심이 600kcal, 안심이 800kcal라 하면 나는 그 돈까스 가게의 등심과 안심 사진을 찾는다. 등심이 6조각, 안심이 6조각이면 600/6, 800/6을 하고, 나는 하루에 1,000kcal 이하로 먹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돈까스에는 샐러드도 있고, 밥 먹고 나면 카페도 갈 거니까 돈까스는 몇 조각 먹을 수 있는지 계산한다. 돈까스에는 하루 전체 칼로리인 1,000kcal의 반인 500kcal만 할당하는데, 또 500kcal가 넘으면 안 된다. 501kcal도 안 된다. 차라리 400kcal를 먹지. 그런 식으로 내가 등심 몇 조각, 안심 몇 조각 먹을 수 있는지를 미리 생각해 간다. 그러고는 가서 등심과 안심의 크기를 본다. 제일 작은 조각을 골라 먹는다. 진짜 환장할 노릇이다.
이 칼로리 매일 계산하는 게 귀찮으니까, 아예 엑셀에 내가 주로 먹는 것들 표를 만들어서 관리했다. 놀랍게도 내 기억에, 첫 상담을 다녀온 뒤에도 이렇게 했다. 오히려 상담 전에는 아예 안 먹었으니까 상관이 없었고, 상담 뒤에 먹으려고 이렇게 했다. 더 이상한 강박이 생긴 거다.
강박은 끝도 없었다. 쪄도 되는 날X1, 빠져야 되는 날X2로 매일 매일, 여전히 무게를 쟀다. 그나마 조금 나아지려고 쪄도 되는 날X1, 빠져야 되는 날X1로 비율을 맞췄다. 못 맞추면 안 먹었다. 예상치 못한 약속, 회식이 있을까봐 사실은 쪄도 되는 날도 마음대로 못 먹었다. ‘내일 약속 생겨서 빠져야 되는 날인데 찌면 어떡해?’라는 멍청한 생각 때문이다. 분명히 예전에 비해서는 먹으니까, 좋아진 게 맞는데 좋아지지 않았다.
상담 선생님은 나한테 ‘이 정도를 먹으면 살이 쪄야 되는데, 왜 안 찌냐’고 물었다. 그 당시 나는 식단 기록을 썼다. 물 한 모금을 먹어도 다 적는 거다. 그걸 보고 선생님이랑 상담하는 거였는데, 사실 과장해서 썼다. 예를 들면 샐러드 반 접시라고 쓰면 사실 40% 정도만 먹은 거다. 마트 시식코너에서 먹은 것도 ‘고기 한 입’이라고 썼다. 한 입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이 사실을 듣고 나중에 선생님은, ‘그런 건 먹은 거라고 하지 않아요’라며 나에게 앞으로 그런 류의 음식 섭취는 쓰지도 말라고 했다. 새끼손톱만큼 먹고 먹었다고 하니까.
운동 강박도 나아지는듯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내가 운동을 진짜 많이 할 때는, 홈트레이닝인데도 불구하고 하루에 적어도 1시간 30분 이상, 많으면 4시간씩 운동을 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코로나라서 헬스 등 하드한 운동은 안 했는데, 대신 홈트레이닝을 아침에 2루틴, 저녁에 2루틴 했다. 영상은 내가 고르지 않고,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대로 했는데, 50분짜리 영상을 계속 추천해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럼 그냥 50분짜리 영상을 4개 계속 하는 거다. 물론 1시간 30분, 4시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근데 나는 그때 식빵 한쪽 먹고 이렇게 운동하고, 심지어 걷기까지 했다. 회사를 가야 되고, 생활을 해야 하니 새벽 4시에 눈을 떠서 운동을 하고, 1시간 이상 걸었다. 퇴근하고 1시간 이상 걷고, 와서 또 운동을 했다. 아무 것도 안 먹고 저렇게 운동한 날도 많았다. 그야 말로 미친 나날이었고, 내가 어떻게 생존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찾아보니 정신병 중에 치사율이 가장 높은 게 식이장애라고 했던 것 같은데, 돌이켜 보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안 먹고 운동만 하니까, 멀쩡할 리가 있나. 운동도 줄이려고 하기는 했다. 루틴 4개에서 2개로 줄이기, 걷기를 하루에 한 번만 하기 등등.. 그 순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치만 그 강박은 꽤나 오랫동안 나를 갉아먹었다. 예를 들면 나는 2023년 말에 사이판 여행을 갔는데, 사이판은 완전 휴양지다. 리조트 안에서만 논다. 근데 나는 걷기 강박이 있으니까 하루에 몇 번씩 그 리조트를 1시간 이상 걸어야 했다. 예전에 어디서 40분 이상 걸어야 지방이 탄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래서 1시간이었다. 같은 풍경을 보고 또 봤다. 액티비티를 즐기지 않아서 사이판에서 다른 활동은 안 했는데, 걷기를 그렇게 많이 해서 다리가 아팠다. 리조트를 족히 150바퀴는 돌았으리라.
운동을 아예 끊으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건강해야 한다는 핑계로 아예 끊지는 않았다. 사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도 홈트도 하고, 걷기도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걷고, 끼니를 먹으면 (웬만하면) 걷는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 날이면 아침에 걷고, 식사하고 나서 걷는 게 최소한의 루틴이다. 그래도 이제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걷는다. 대개 내 산책 코스가 20분정도여서 그 정도 걷는다. 원래는 1시간 30분 이상 걷기, 1시간 20분 이상 걷기 등 미친듯이 걸었고, 그 시간을 조금씩 줄여나가서 40분 걷기, 30분 걷기, 20분 걷기까지 가다가 이제는 시간을 안 보고 걷기까지는 줄여낸 거다. 20분 걷기 이럴 때도 진짜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시간을 10분 단위로만 보려 했다. 근데 그게 반올림이 아닌거다. 11분에 나왔으면, 그건 20분에 걷기 시작한 거라고 생각했다. 무슨 개똥같은 소린데, 나는 그랬다. 그래서 11분에 나와서 20분 동안 걸으려면, 40분까지 걸었다. 근데 그 40분까지 걷는 것도, 알람을 맞추는 게 아니다. 길 지나가다가 시계가 보이는데, 그게 40분을 넘었을 때까지 걷는 거다. 그 와중에 또 아날로그 시계는 안 정확하다고 안 본다. 버스 정류장 시계 같이 디지털 시계, 확실한 시계만 보는 거다. 그래서 골목길을 걸을 때면 더더욱 환장했다. 버스 정류장이 없으니까 큰 길이 나올 때까지 걷는 거다. 그러면 결국 11분에 나와서 20분을 걷는다고 해도 1시간을 넘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시계를 안 보고, 적당히 20분정도 거리를 걷는 지금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다. 100% 벗어나진 못했지만, 식이장애를 적당히 무시하고 살 수 있는 법을 찾았달까. 하루에 3만보씩 걷는 게 딱히 특별한 일까지는 아니었던 그 시절에 비하면, 나 많이 나아졌다.
그래. 나는 상담을 시작하면 뭔가 다이나믹하게 달라질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그치만 많이 좋아진 건 맞다. 절망과 희망을 오가고, 아직도 끝이 안 보이기도 하지만 일단 간다. 그래도, 시작이 희망적이면서도 참 많이 아팠다. 시작이 반이라는데, 대체 남은 반은 또 얼마나 길지 감도 안 왔다. 그러면서도, 내가 식이장애를 앓은 기간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더 걸리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