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화가 좋으냐 물어보신다면
작성자 더셀룰로이드
영화 담론
왜 영화가 좋으냐 물어보신다면
어떤 질문들은 답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왜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은 특히 그렇다. 마치 오랜 친구에게 왜 그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그 질문에는 진심 어린 애정과 함께 수많은 순간들이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요약하기엔 너무나 복잡하고, 단순한 문장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이번 아티클은 그 질문에 대한 기나긴 답변이자 영화 예술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 찰 예정이다.
1895년,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영화의 위대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영화라는 열차가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그 종합 예술적 가치와 깊이에 모든 이들은 사로잡혔으며, 각자의 문화권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영화는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맥락에 따라 국가별로 민족적인 색채가 가득 담겼으며, 이 시점부터 영화는 비로소 예술로서 인정받기 시작한다.
독일의 표현주의,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바그, 미국의 아메리칸 뉴 시네마. 1948년, 알렉산드르 아스트뤽은 ‘카메라 만년필론’을 제시한다. 영화감독이 한 명의 예술가, ‘작가’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엄연한 예술이다. 그 모든 시청각 정보를 한데 모아 미학적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매체, 그것이 예술로서의 영화 – 필름(Film), 혹은 시네마(Cinema)이다.
영화의 특수성: 함축성/경제성🎞
영화는 ‘종합예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만큼, 수많은 요소를 함축하여 제시하는 예술 분야이다. 영화는 모든 예술 분야를 품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의 청각성과 회화의 시각성, 무용의 역동성과 사진의 시간-봉인적 속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연극적 특징.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다시 보면, 평균 35초 정도로 여겨지는 하나의 컷, 즉 화면이 다음 영상으로 바뀌기 이전의 프레임들의 집합은 그 자체로 엄청난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짧은 시간 속에서도 시각적, 청각적, 영상적 모티프가 무한하게 담겨있으며, 말하자면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담겨진 연출자의 시선을 담아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는 컷으로만 이루어진 매체가 아니지 않은가. 영화는 촬영과 편집의 결과물이다. 즉, 영화가 완성되는 최종점은 편집이다. 그렇다면 편집에서 비롯된 연속성의 자극, 다시 말해 컷에서 다음 컷으로 넘어가는 부분의 예술적 의미 또한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쇼트들의 집합이 모여 씬이 되고, 씬이 모여 시퀀스가 된다.
할리우드 영화를 기준으로, 보통 한 영화에 포함되는 컷 수는 1500컷에서 2000컷을 넘나든다. 만약 액션 영화나 스릴러처럼 쇼트의 변화가 잦아야만 하는 영화라면 3000컷이 훌쩍 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라는 매체 안에는 얼마나 거대한 미학적 자극이 집약되어 있는 것인가? 그 짧은 3초의 컷 하나, 그 컷에서 다른 컷으로 넘어가는 텀에서의 편집적 자극도 무시하지 못할텐데, 이것을 적어도 1500번 이상 반복하다니. 영화는 그런 매체이다. 평균 100분이라는 시간 동안 24프레임, 다시 말해 1초에 24번씩 죽었다가 깨어나는 사진들의 반복이 평균 35회 반복되고, 또 그 과정이 최소 1500회 이상 되풀이되는. 거기에다 사운드라는 요소까지 더한다면, 더 이상 예술로서의 영화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현시점 모든 예술 중에 그 집약도와 함축성이 가장 강한 매체이며, 의미상 가장 많은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이다.
그런데 만약 이 정보성 쇼트 내에 간접적인 예술적 의미를 담아낸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러한 쇼트들이 하나하나 유기적으로 모여 일관된 의미를 지닌 씬을 이루고, 그 씬이 모여 시퀀스를 이루고, 결국에 깊이있고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완성된 영화로 거듭난다면 어떤가. 그것은 이제 상업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로서 인정되기 시작한다. 예술 영화가 되는 과정은 위와 같다. 본질적인 이야기의 원형에서 시작된다는 부분은, 극영화가 결국 서사 예술이라는 점에서 동일할 수밖에 없는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보아야 하는 것은 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간접적으로 깊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는 온전히 연출가 – 혹은 작가에 달렸다. 영화는 경제의 예술임과 동시에, 간접성의 예술이다. 어찌 보면 서사 예술 자체가 간접성에 의존하는 예술이리라.
영화의 특수성: 간접성 🎭
예술은, 특히 이야기를 다루는 예술은 본디 간접적인 성향을 지니고 탄생한 분야이다. 예를 들어, <미녀와 야수>라는 대중적인 동화를 처음 마주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자. 만약 어린 시절의 당신에게 부모님이 다가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선 안 돼! ” 라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고 해보자. 과연 유치원생인 당신은 이 메시지가 와 닿을까? 물론 직접적인 전달로 얻을 수 있는 직관성은 있겠으나, 이런 교육 방식으로는 사람이 다소 수동적인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당신에게 <미녀와 야수>라는 동화책을 쥐어준다면, 혹은 읽어준다면 어떤가. 당신은 <미녀와 야수>라는 이야기 자체를 하나의 알레고리로 느끼게 된다.
즉, 미녀와 야수 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 삶의 가치로 자동적으로 환원되어 ‘가치관’이라는 것을 형성한다. 바로 그 가치관이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라는 동화의 메시지일 것이다. 결국 성장의 결과물은 같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다르다. 동화는, 이야기는 자각과 계몽의 과정에서 ‘주체성’이 포함된다. 당신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주체적으로 이야기의 정보를 재구성하며, 당신의 무의식은 이야기에 깃들어 있는 잠재적 메시지를 해석하여 삶의 가치로 치환시킨다. 이것이 서사 예술의 미학이며, 이야기 예술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간접성의 덕목이다.
그래서 다시, 왜 영화가 좋으냐 물어보신다면 🎬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나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가 영화를 취미로 삼고 진심으로 애정하며 좋아하는 이유는 '대략적으로' 위의 글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 지독한 함축성-경제성-간접성 때문에 무르나우에 빠져들었고, 브레송에 닿았으며, 타르코프스키를 사랑하게 된 후 라스 폰 트리에에 이르렀다.
당신은 어떠한가. 이 긴 글을 지금까지 읽어주었다면 일정 부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일 터인데, 어떤 이유로 오늘도 영화를 재생하고 계시는가. 이번엔 필자가 묻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