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나 교통사고 났어,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줘

이모 나 교통사고 났어,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줘

작성자 나나

엄마를 이해하지만, 사랑할 순 없어

이모 나 교통사고 났어,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줘

나나
나나
@naneunnaya
읽음 295
이 뉴니커를 응원하고 싶다면?
앱에서 응원 카드 보내기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났다. 수시 1차 합격 여부가 한창 나오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예상대로 A대학교 1차 합격 결과는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였다. 괜찮다. 1차 합격한 B대학교가 있고, 논술도 하나 남았으니까. 아예 타격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써본 학교였다. 그래서 그냥 친한 동생을 만나러 갔다.

그 날은 비가 왔다. 동생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 와. 내가 다니던 중학교 정문 앞, 차가 들어오려 했는지 나가려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차는 우산을 쓰고 걷고 있던 나를 그대로 쳤다. 순식간이었다. 당황하던 차주의 얼굴이 보였으니, 중학교로 진입하려 했던 걸까? 차주는 차를 뒤로 뺐다. 내 교복은 치마가 찢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차주는 동네 꽤 큰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근데 병원 방향이 아니었다. 정신이 정말 없었지만, “이쪽 그 병원 아닌데요”하고 이모에게 연락했다.

교통사고 났다고, 근데 엄마한텐 말하지 말라고.

대학도 떨어졌고, 교통사고도 났으니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엄마가 나를 혼낼 것만 같았다. 위에서 A대학이라고 했지만, 그 대학은 S대였다. 엄마는 항상 나를 공부 잘하는 딸로 키우고 싶어 했다. 공부, 대학, 좋은 직업. 외가 안에서 애초에 나는 그런 기대를 받고 자랐다. 외할머니는 나를 “박사”, “교수님” 등으로 지칭했다. 통상 칭할 수 있는 말일지라도, 나에게는 압박처럼 느껴졌다. 초등학교 때도 시험에서 틀린 개수로 혼나고, 이과 가라고 나는 흥미도 없는 ‘우주소년단’(지금도 있는진 모르겠다)에 강제로 가고(나는 그 당시 친구들이 많이 하는 ‘걸스카우트’나 ‘아람단’처럼 좀 더 소프트한 활동이 하고 싶었다), 영재 학원에서 하는 수학경시대회 상담을 가고, 나는 못하겠다고, 피아노가 더 재밌다고 하니까 “그럼 그냥 피아노도 아무것도 하지 마라!”고 혼나서 사과하고, 시험 결과가 나올 때마다 쓴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당연히 엄마랑 떨어져 사니까, 그 감정을 풀 시간도 없었다. 혼나고, 그냥 삭히고, 형식적인 대화가 오가고, 시험이 끝나면 또 혼나거나 뭐 그랬다. 시시콜콜한 대화가 없었다. 나는 정말로 공부가 싫었다. 지방에 살던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었던 건 그냥 엄마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싶어서였다. 현실적으로 S대가 불가능한 건 알지만, 대학에 떨어진 그날 나는 그게 참 압박스러웠다.

엄마는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그딴”, “니”, “그따구” 등 날선 말을 했다. 나는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영재 학원, 경시대회, 교육청에서 하는 영재반 등등, 엄마는 내가 그런 데 속하길 원했다. 아빠처럼 의사를 시켜야겠으니, 나는 흥미도 없는 이과쪽으로 집중됐다.

대학도 떨어졌고, 교통사고가 났으니 일단 뭔가 잘못됐다. 혼날 것 같았다. 뭐, 사실 교통사고가 내 잘못은 아니겠지만 엄마한테 말하면 그냥 혼날 것만 같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나에게 엄마는 그냥 그렇게 무서운 존재였다. 사랑, 애정, 투정, 친근함보다는 압박, 공포, 나 때문에 희생하니까 내가 갚아야 하는 존재, ‘니 엄마 니 때문에 고생하니까 니가 잘해야 하는’, 나를 압박 속에 가두는 존재였다.

교통사고가 났으니 집은 못 들어가고, 숨길 수는 없고, 보호자는 사실상 이모였다. 어차피 나는 이모랑 살고, 사실 이모만 말 안 하면 엄마는 알 수가 없다.

뭐, 그렇다고 이모가 당연히 엄마에게 말을 안 할 수는 없다. 엄마는 병원으로 찾아왔고, 당연히 매서운 얼굴로 “니 교통사고 난 거 말하지 말라했다매”, 또 냉전이 시작됐다. 찢긴 교복 치마보다, 다친 다리보다, 금이 간 꼬리뼈보다 엄마가 더 무서웠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엄마가 ‘공포’의 존재이기도 했지만, 이제 기대를 겪지 않고, 사랑을 바라지 않으면서 점점 엄마를 내 삶에서 지워나가려고 하기도 했다. 그 혼돈의 시기였다. 그래서 퇴원하겠다고 뭔 말도 안 되는 떼를 썼다. 당연히 싸웠다.

나에게는 이모가 둘 있는데, 나를 키워준 이모 말고 다른 이모(이전 편에서 내 일기장을 보고 엄마랑 같이 안 산단 거 굳이 쓰지 말라는 이모)는, 나에게 다 들리게 병실 밖에서 본인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니 공부 못해도 된다. 저딴 식으로 크지만 마라. 공부 잘 해도 다 소용 없다.”

공부 잘하라고, 그것 때문에 엄마랑 나는 멀어졌고, 나는 그것 때문에 엄마가 무서워졌는데. 나는 공부 잘하고 싸가지 없는 년이 됐다. 당연히 저 상황이 엄마도 속상했겠지만, 이모도 화가 났겠지만, 나는 저 말에 참 상처받았다.

저 말을 한 이모네 집처럼, 딸이 공부를 잘하든 그렇지 않든(실제로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사랑받을 수 있는 딸랑구로 컸다면 이렇게는 안 되지 않았을까? 근데 이모도 나에게는 공부 잘하라고 했는걸. 나와 그 아이의 역할과 기대치는 달라서? 뭐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똑똑했던 의사 아빠와 떨어져 나를 혼자 키우게 돼서? 학군 때문이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나를 이모집에 맡기고, 엄마는 본인의 엄마 아빠와 살러 가서? 공부를 잘해야 하고, 이과에 가야되는데 내가 수학/과학을 못해서? 엄마와는 주말만 봐서? 내가 수학/과학 영재가 아니어서? 내가 피아노와 노래, 작곡 등 음악을 하고 싶었어서? S대를 못가서? 어릴 땐 엄마를 너무 사랑했고, 중학생 때 크게 상처받고, 고등학생 때는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았는데, 엄마는 어릴 땐 힘들어서 외면하고 싶었고, 중학교 땐 뜻대로 되지 않는 내가 속상했고, 그 뒤에는 이미 늦은 걸 알아 되돌리고 싶었으니, 서로의 타임라인이 맞지 않아서?

엄마가 뭐 하나 죽을 죄를 진 건 없다. 그치만 이 모든 게 나에게 반복적으로 일어나서는 안 됐다. 나도 좋은 딸은 아니었겠지, “저딴 식으로” 컸으니까.

나는 밖에서는 참 말 많고 밝은데, 집에만 가면 말이 없다. 엄마, 외할머니, 이모 등은 “어릴 땐 애교 많고 말도 많았는데”라고 한다. 그건 가족 앞에서만 그렇다. 어디가 잘못됐는진 모르지만, 어쨌든 내가 그렇게 밝고 맑고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분명한 건 나는 아직도 많이 아픈가보다. 사실 나는 다 잊고 산 줄 알았는데, 이 글을 쓰니 새삼 또 마음이 아픈 걸 보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지만, 적어도 교통사고가 났을 때 엄마한테 말하지 말아 달라는 생각 자체가, 이미 그 훨씬 전부터 뭔가 꼬여 있었단 걸 의미한다.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께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