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악을 특별하게 여기는가
작성자 해류
유익한 지적허영심
우리는 왜 악을 특별하게 여기는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은 자조적인 서술임을 명시하고 싶다. 필자 역시 ‘악인’과 ‘악’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이다. 필자는 다양한 작품 속의 악을 좋아한다. 그들의 비도덕적이고 사회적으로 규탄 받음이 당연한 상식 밖의 언행에 열렬히 환호한다. 그리고 자주 현실 속 자극적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들을 찾아보며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소비를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왜 악을 특별하게 여기는가, 악을 매력적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하, 이어지는 글을 학술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개인의 의견이다.
선과 악이 어떻게 구분 지어지는가에 대한 장재현 감독의 <사바하>적 담론은 둘째치고 우선은 선과 악으로 사회를 양분해두겠다. 그 안에서 악은 사실 특별하지 않다. 성악설 또는 악의 평범성 같은 나름의 전문성 있는 이야기로 가지 않더라도 악은 너무나 평범하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감독이 지적했다시피 무지와 무관심 또한 악이 된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악을 범하고 있다. 도덕, 윤리, 규범을 사회는 당연성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그 당연한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행해지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으면 도덕과 윤리, 정의라는 이름을 붙여 법과 규칙으로 정해야만 했겠는가가 필자의 생각이다. 또한 인간은 무한한 욕구가 있는 생물이며 일탈과 자유에서 자극을 느낀다. ‘악한 행동’을 그러한 욕구를 아주 손쉽게 충족해 주는 매력적인 매개체이다. 악과 악인에게 매력을 느끼는 인간은 악인에게 대리적으로 욕구를 충족 받고 그들에게서 공감과 일탈감을 느낀다.
그러나 악한 행동은 다수에게 바람직하지 않으며 악인은 규탄을 받는다. 공동체 안에서 사회가 세운 도덕과 윤리를 학습한 인간은 악이 수치스러운 행동임을 학습하면서 악은 매력적이며, 자신 역시 악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허나 동시에 인간은 꾀가 많은 짐승이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악인과 자신을 분리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는 데 바로 악인을 ‘특별하게’, 프레이밍framing하는 것이다.
악인을 특별하게 프레이밍하면서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첫 번째로, 타자화the other이다. 일반적으로 타자화는 타자화하는 대상과 자신의 다른 점 특히, 타자의 열등한 점을 강조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악인에 대한 타자화도 악인을 열등하게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악인에 대한 타자화의 의도는 악인은 특별하고 평범성에서 동떨어져있으므로 평범한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화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은 악인이 아니며 그들과 다르고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사람이라는 위안을 얻는다.
허나 이렇게 타자화될 수 없을 때 자신이 곧 악인임을 받아들여야 할 때 프레이밍의 두 번째 효과가 등장하게 된다. 쓰면서도 과한 표현이라는 판단이 들지만 더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이 두 번째 효과를 우상화偶像化라고 하겠다. 사람들은 만일 자신이 악인이라면 더는 그들과 구분될 수 없다면 그 악인이 보다 특별한 존재라서 다른 이들과 차별점이 있기를. 그래서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악마, 괴물, 사이코패스, 전지전능한 빌런. 악인이라는 것 자체로 더 대단하고 거창한 존재 혹은 남들과 다른 더 매력적인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악은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다. 개인을 특별하게 기준 짓는 것은 각 개인이 가지는 고유의 특성이자 선함이지 악이 될 수는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결론에도 물론 비판점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악의 특별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