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성에 관한 물음들
작성자 집과둥지
쇼트와 시퀀스
정상성에 관한 물음들
김보통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D.P.>(dp, 디피)에서 주인공은 군무 이탈 체포조인 dp에 소속되어 탈영병들을 잡는다. 시즌 1에는 탈영병을 추적하고 데려오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탈영의 '이유'와 중심 캐릭터인 석봉의 이야기가 섞인다. <디피>에서 석봉은 일명 오타쿠라는 이유로, 준목(2화)은 잠과 코골이 때문에 가혹 행위를 당한다. 석봉의 친구 루리 역시 체형 때문에 '돼지'라 불리며 괴롭힘당했다.
군대라는 폐쇄적 집단이 갖고 있는 '보통'의 무난함과 '보통 밖의 것'의 위기를 생각했다. 보통과 보통 아닌 것은 정상과 비정상으로 짝지어지고, 이는 곧 다수와 소수로, 제압과 제압-당함으로 이어진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다름을 제거해도 좋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신적 물리적 폭력이 괜찮은 것이 된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특징이 이런 분위기를 심화시킨다.
군대뿐만 아니라 다수 쪽에 속해 있는 정상이 소수의 비정상을 얼룩으로 여겨 지우려는 시도는 어느 집단에서나 일어난다. 그러나 과연 ‘정상’이란 무엇인가? 정상성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원더
⎯돋보이게 태어난 사람은 섞이기 어려워
<원더>에서 어기는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림당한다. 어기의 얼굴이 다수의 얼굴이었다면 어떨까? 보편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준에 입각한 평가다. 내가 말하는 보편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영원한 보편일 수 없는 것이다.
어기의 누나가 어기에게 말한다. “You can't blend in when you were born to stand out.(돋보이게 태어난 사람은 사람들과 섞이기 어려워.)” 특별함으로 여겨질 수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은 쉽게 섞이지 못해 차별이 된다.
정용준의 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의 주인공은 말을 더듬는다는 이유로 수치를 겪고 무시를 당한다. 국어 선생님도, 엄마도, 엄마의 남자 친구도.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고장 난" 사람으로 여긴다. 주인공은 언어교정원에 다니며 그곳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며 '말'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자기를 옥죄던 언어를 자기만의 언어로 승화하게 되는 셈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말 더듬기'를 안고 산다.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남들에게 놀림거리가 되는, 어려움들. 말 더듬기는 서로 다른 모양으로 존재한다. 그저 어떤 것은 말 더듬기나 외모처럼 겉으로 드러나고 어떤 것은 보여주지 않으면 보이지 않아 숨길 수 있을 뿐이다.
<원더>는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영화다. 내용 자체를 따라가면 ‘힐링 영화’라 할만하지만 사실 주인공 어기의 상처와 가족의 상실, 그리고 주변인들의 아픔을 조명한다. 영화의 흐름을 따라 각자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에 아파하고 또 아픔을 주는지 알게 된다. 우린 누구나 힘겨운 싸움을 하고 그래서 서로에게 더 친절해야만 한다.
코다
⎯감정은 클리셰가 되지 않지
영화의 제목인 ‘코다(CODA)’는 Children Of Deaf Adult의 약자다. 청각 장애 부모의 자녀를 이르는 말로 청인 자녀를 지칭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주인공 루비는 어려서부터 세상과 부모님의 통역기가 되었다. 루비는 자신의 꿈과 가족 내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한다. 가족들은 루비가 필요하고 그 필요에 의한 요구는 상처가 되었으며 책임감은 때론 죄책감이 되었다. 가족을 사람들과 청인들과 섞이도록 할 수 있는 루비가 그 역할을 이행하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은 분명 장애가 있는 사람의 삶의 질을 높이고 고통을 줄여나가고 있다. 나는 이러한 과학적 발견과 기술의 응용을 지지한다. 그러나 과학이 장애에 관한 정체성 물음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가 인간이며, 조만간 그 장애는 극복될 것이므로 너는 더 '온전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규정하지 (identify) 않는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과학이 장애를 여전히 '없음의 상태(결여)'로만 바라본다면 휠체어는 기술적으로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여전히 보행 능력 '없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보조기기로만 간주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더 발전된 휠체어를 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더 크게 결핍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른다." (pp.60-61)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 김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를 '비장애로 회복/치료'하려는 과학 기술의 환상에서 벗어나, 사회 속 안착과 진입을 돕는 현실적 의미의 과학기술 관점을 제시한다. "치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관점은 현실에서 장애인들이 지금보다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지워버린다."(pp.81-82) 일명 주류의 외부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 해서든, 이를테면 기술결정론적 사명으로, 주류의 일부로 끌어오는 게 해답이라 할 수 있는가. 루비의 오빠는 말한다. “사람들이 농인이랑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지”라고.
루비는 노래에 재능이 있지만 가족들은 루비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 아빠는 딸의 노래를 성대의 울림으로 감상한다. 입시 오디션에서 루비는 자기를 지켜보는 부모님을 위해 수어를 하며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그저 다른 방식으로 감상하면 될 따름이다. 다시 말해, 단순히 노래를 감상하는 것 외에 모든 경우에, 다른 방식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될 뿐이다. 그러한 방식도 있어야 하며 있을 수 있다는 걸 당연하게 여기면 될 뿐이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정상과 돌연변이와 인간과 뮤턴트
돌연변이(mutant)와 인간에 관한 영화. “be normal” 그러니까 ‘평범하게’란 뭐란 말인가?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서 ‘뮤턴트’들은 인간보다 강하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는 우월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다. 사회는 이미 모종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져 있으며 그곳에 이물질처럼 존재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뮤턴트들이다.
뮤턴트는 그 자체로서의 정상성을 가질 수 없는가? 왜 없는가? 영화에서 찰스 자비에는 마음을 읽고 텔레파시를 보내는 능력이 있다. 뮤턴트인 그의 능력은 겉으로 티가 나지 않는다. 그는 인간으로서도 돌연변이로서도 ‘잘’ 살아간다. 오히려 양쪽의 좋은 부분만 취한 셈이다. 그러나 하반신 마비는 그에게 일종의 ‘결핍’을 안겨준다. 영화의 구분선을 사용해 표현하자면, 돌연변이가 된 것이다.
뮤턴트들은 힘을 가졌음에도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길 꿈꾸기도 한다. 이런 식의 메시지는 영화 <아바타>와 만화 <기생수>를 떠올리게 한다. 스스로 보통이라 칭하는 인간들과 그들의 신체적 능력을 뛰어넘는 진영 간의 대립, 겉으로는 그러하지만 이면에는 그 ‘보통이라 칭하는 인간들’의 적의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담겨있다. 이기심. 다수의 이기심. 다수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자만. 우리라고 명명하지만 실은 자기만의 안위다.
그렇게 이들의 첨예한 대립과 선과 악이라는 논리와 논리의 근원을 살피다 보면 묻게 되는 것이다. 정상이라는 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