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과 혜산에서 온 강혁: 대북제재가 원산과 혜산에 미친 영향
작성자 ehwa
대북제재가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
원산과 혜산에서 온 강혁: 대북제재가 원산과 혜산에 미친 영향
90년대 대기근을 기점으로 운명이 뒤바뀐 두 도시
강혁의 고향 혜산, 그리고 성인이 되어 이주했던 원산. 강혁은 대북제재 이후 두 도시의 모습은 달라졌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북한 전역을 휩쓸었던 대기근(일명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원산과 혜산의 도시적 위상이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대기근 이전 원산은 휴양지로서 도시적인 느낌이 강했던 반면 혜산은 시골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대기근 이후, 중국과 바로 맞닿아 있는 혜산이 밀수에 유리해지면서 주민들이 경제활동을 영위하기에 더 좋은 곳이 되었다고 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 기점으로 (북한이) 중국 때문에 살고 있잖아요.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혜산이 뭐 살기 나쁘다고 맨날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근데 내가 커서 이렇게 돌아다녀보면 혜산이 진짜 살기 좋은 곳인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대북제재가 두 도시에 미친 영향도 각기 달랐다. 원산은 일본과의 교역이 끊기면서 일반 주민들이 큰 타격을 받았고, 혜산의 경우 주민들이 밀수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강원도 원산: 사회주의 경제의 발전을 선전했던 상징적 도시
원산은 해방 직후 인구 11만 명으로 평양, 청진, 신의주, 함흥과 함께 북한의 5대 도시 중 하나였다. 항구도시로 무역과 상업이 번성하였고, 온화한 기후를 갖췄으며 해산물이 풍부했다. 또한 명사십리와 송도유원지 같은 휴양지와 금강산과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다. 6.25 전쟁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는 사회주의 경제의 발전을 선전하는 상징적인 도시로 발전했다. 1960년대에는 동유럽과 소련 유학 기술자들이 도시계획을 추진하고 전후 복구사업을 완료하였으며, 1978년에는 평양-원산 고속도로가 완공되었고, 원산조선소가 북한의 주요 조선소로 성장했다. 또한 원산항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산업 설비, 수송기계, 전자기기 등을 수입하고 농산물, 의류임가공품 등을 수출하여,국제 무역의 중심지로 역할을 했다.
대북제재 이후 어려워진 주민들의 삶
1990년대 대기근 이후 식량 및 원자재, 에너지가 부족해지면서 산업 생산이 급감했지만, 원산은 일본과의 교역과 재일 동포들의 방문으로 인한 경제적 활동 덕분에 타지역에 비해 견딜만했다. 하지만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일본인 납치문제가 부각된 이후, 일본은 2006년부터 독자적인 대북제재를 감행한다. 인도적 지원, 10만 엔 이하의 대북 송금 외 금융 거래, 일본과의 교역, 인적 왕래가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과의 교역으로 지역 경제가 운영되던 원산 주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워졌다.
장사는 ‘돈주’들만, 심해진 빈부격차
강혁에 따르면 원산은 국경과 멀기 때문에 주민들이 밀수하기에 어려운 환경이다. 물건의 반입과정이 국경지대보다 상대적으로 길고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이윤을 남기려면 밀수의 규모가 커야 한다. 즉 규모를 감당할 만한 자금력이 있는 돈주 (자본가)는 장사로 이윤을 얻을 수 있으나, 자본이 부족한 일반 주민들은 장사를 하기 어렵다.
“원산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해요. 주로 차판장사하는 거죠. 아마 기차 장사도 돈 많은 사람들이 하는데 이렇게 빵통 하나씩 해가지고 거기다 자전거 전체 다 실어서 (운반하고). 저는 그때 양강도는 평민들이 살기 좋고 이런 국경이란 먼 원산 같은 이런 데는 돈이 많아야 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크게 (장사) 안 하면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국경 지역에 위치한 혜산의 경우, 일반 서민들도 밀수를 통해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양강도 혜산: ‘못 사는 시골’에서 밀수 가능한 사경제 형성
혜산은 90년대 대기근 이전에는 원산과 달리 ‘시골’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기근 이후 혜산이 지리적으로 중국과 맞닿아 있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면서 주민들은 밀수를 통해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강혁은 혜산이 더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배급이 끊겨도 장사를 하며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북제재 이후 폭등한 쌀값
하지만 대북제재 이후 혜산 주민들의 생활은 불안정해졌다. 강혁에 따르면, 중국과의 밀수 경로가 막히면서 물자 공급이 줄어들고 사재기 현상이 일어나면서 쌀값이 폭등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대북제재인 것 같아요. ‘정세가 복잡해진다’고 하면 몇 월부터 몇 월까지는 중국에서 단속이 심해지는 거예요. 미국에서 그런 제재를 하지 않았나 싶은데, (물자가) 넘어가다가 걸리게 되면 중국 쪽 정부에도 안 좋은, 그러니까 눈치를 보는 거잖아요. (중국이) 미국 눈치를 보게 되면 (경로가) 막힌단 말이에요. 그럼 그때부터 이제 쌀값이 이제 막 2배, 3배로 막 올라가는 거죠. 근데 시장에서 막힌다 막 소문만 나도 사람들이 쌀을 막 사들이는 거예요. 집집마다 (가격이) 올라갈 걸 예상을 해가지고. 나중에는 막 쌀값이 금값이 되는 거예요. 국내(에서 나는 쌀만으로는)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북한 당국의 밀수 독점으로 개인 밀수 뇌물비용 올라
이에 더해 북한 당국이 양강도 밀수지역을 장악하도록 지시하면서 밀수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강력한 대북제재로 인해 통치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국가 차원에서 밀수를 주도하고, 그 수입 또한 국가가 환수하면서 개인 밀수가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 차원에서 밀수를 하기 위해 국경지대 공무원에게 지불해야 하는 뇌물의 비용이 높아졌다. 때문에 한 번에 많은 밀수품을 나르려다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한 주민이 압록강에서 익사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 경제 구조의 변화와 주민들의 생활 변화
북한의 경제 구조는 소련의 붕괴로 인해 무너졌고, 배급 시스템도 중단되었다. 주민들은 배급이 없어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고자 했지만, 강력한 대북제재로 인해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원산은 특정 돈주들에게만 유리하며, 혜산 주민들은 밀수를 통해 생계를 이어왔지만 이마저도 어려워졌다. 대북제재는 김정은 정권을 압박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어려움을 겪는 북한 주민들을 위한 관심과 대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출처]
박명희, “일본의 대북제재 현황과 주요 쟁점”, 이슈와 논점, 제1839호.
[참고]
원산은 항구도시로 무역과 상업이 번성하였고, 대일본 무역의 중심지였다.차판장사란 차로 물건을 대량매입해 판매하는 방식의 장사를 말한다. “북한의 ‘대거리꾼’을 아시나요?”, RFA, 2015.09.28.빵통이란 기차 화물칸을 말한다. 안해룡, “ ‘빵통’ 전투를 아시나요?”, 시사저널. 2005.07.08.
본 아티클 프로젝트는 여성정치연구소 2023년 소모임지원 사업 운영비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