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 IB 영어: 겉보다 내면의 힘

작성자 수인

국제 바칼로레아 학생의 렌즈

ep 5. IB 영어: 겉보다 내면의 힘

수인
수인
@sooin
읽음 238
이 뉴니커를 응원하고 싶다면?
앱에서 응원 카드 보내기

내가 듣는 국제 바칼로레아 과정에는 크게 두 가지의 언어가 있다. 언어 A와 언어 B. 간단히 말하자면, 둘의 차이는 언어 A과목은 그 언어를 '메인'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 한국어를 배우듯, 문학과 비문학 전반적인 모든 것을 배운다. 반대로 언어 B는 그 언어를 '서브'로 공부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제 2외국어인 영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유학생들이 (특히 영어권 국가에서 유학중이라면) 공감할 것이 바로 영어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수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도 수학은 어느 나라를 가도 숫자와 기호라는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하기에 언어 장벽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영어는 내 의견을 잘 피력하려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어가 필요해서 수업 중간 문득 언어의 벽이 너무나 높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학에 더 열정을 부었고, 그에따라 자연스럽게 남들보다 월등히 좋은 성적이 나왔던 것 같다. 반면에 영어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속담이 야속하게도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분명 튜터링도 하고, 열심히 공부도 하고,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이해해보려 책을 몇번이고 읽었지만, 내 점수는 여전히 평균 B와 C 그 어중간한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의 첫 에세이와 C-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Pre-IB 때 받은 C-다. 당시 주제가 To Kill A Mockingbird (한국 제목: 앵무새 죽이기) 와 호주 영화 Bran Nue Dae가 어떻게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향한 차별과 편견을 비판하는지 비교/분석하여 1500자정도의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 물론 호주 학교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고, 영어를 잘 몰랐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영어를 아예 못하던 것은 아니었기에 B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열심히 썼는데, 내 노력과는 다르게 성적표에 찍혀있는 C-를 보고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 고등학교에서도 나름 공부를 잘했어서, 내 성적표에서 처음 보는 C-였다. 성적표가 나온 그날은 하루 종일 울기만 했던 게 기억난다. (참고로 D면 낙제다)

그 뒤 그 C에서 벗어나 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었다. 비싼 돈 들여가며 개인 과외도 받아보고, 영어 잘 하는 친구들에게 도움도 빌려보고, 단어장 앞면이 뜯어지랴 외우고, 아침마다 뉴스도 읽고, 책도 여러권 읽고.. 물론 아주 미세하게나마 나아지곤 있었지만 이렇다 저렇다 할 큰 변화는 여전히 없었다.

그랬던 내가 딱 한 번,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고 나서부터 급격히 점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영어를 잘한다는 게 대체 뭘까

그날도 책상에 앉아 어김없이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영어를 잘한다는 게 대체 뭘까? 특히 다른 호주 학생들이 칭찬하는 영어 잘하는 친구는 뭘 잘하길래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는걸까? 처음에는 '지적으로 보이는 단어'나 '적절한 문장구조'를 잘 활용하는 게 영어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글자를 적을 때도, 괜히 explore이라는 단어 말고 scrutinize라는 뜻도 잘 모르는 단어를 써야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에세이는 어려운 단어들로, 어렵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영어를 잘하는 똑똑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그건 답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면접을 준비하며, 정말 말을 잘 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었는데 그 친구들을 떠올려보면 크게 어려운 단어나 문장구조를 쓴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친구들의 답변이 울림이 있다고 생각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하고 있었던 이야기지 말의 겉모습이 아니었다. 단순히 표면적인 답변이 아닌 속 깊이 내재되어있는 의견을 피력할 때,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꼬집어낼 때, '아하~'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말을 할 때, 그때 나는 진정 그들이 한국어를 잘한다고 느꼈다.

그 뒤로 나의 '영어 잘하는 사람'의 기준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동안은 본질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나의 본질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고, 겉치레만 하기에 급급했다. 뜻도 잘 모르는 어렵게 들리는 유의어만 잔뜩 쓰고 복잡한 연결어를 사용해가며 나의 편견 속의 '지적인' 문장을 써내려갔다. 이건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 자체가 설득력이 없는데, 어떻게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는가. 진짜 중요한 것은 굳은 믿음으로 내 의견을 설득력있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후에는, 더 solid한 의견을 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생각해보았다. 다양한 작품해석과 끝없는 토의, 완벽에 가까운 작품과 이해도와 배경지식을 를 바탕으로 나의 본질을 조금씩 바꿔나갔다. 비록 미숙한 단어이고, 문장구조일지라도, 나의 생각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로 나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영어시험에서 1등급 (7, A제로에서 A+사이)을 받았다. 그리고 내 인생 처음으로, 17년동안 영어를 쓴 친구들보다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

언어를 잘한다는 것

가끔 우리는 언어의 겉모습에 집착하곤 한다. 특히 발음과 문법, 이 두 가지에 온 신경을 쓰다보니 말문이 턱 막히기도 한다. 나도 완벽하게 말하려고 할 때, 말이 턱 막힌다. 에세이를 쓸 수가 없다. 첫 한 단어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그 고민을 십여분이고 한다. 분명 원어민과 같은 발음으로, 완벽한 문법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언어를 잘하는 것임은 맞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정말 중요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우린 이미 영어를 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영어 실력을 완벽주의가 가리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 틀에서 벗어나 본연의 실력을 뽐내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