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읽을 때는 '나 뭐 돼'라는 자세로(feat. 윤동주)
작성자 초희
초희의 책GPT
시를 읽을 때는 '나 뭐 돼'라는 자세로(feat. 윤동주)
지난 어느날, 광화문 교보 빌딩 앞을 지나는데 윤동주의 시, '자화상' 속의 구절이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흔히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잖아요. 그 분위기에 힘입어 책을 펴보려고 해 봐도 쉽지 않은데 '시'라니요. 소설, 산문, 에세이, 경제경영, 인문학, 과학 등 여러 분야의 책 중에서도 시는 유독 더 멀게만 느껴집니다.
시를 쓴 저자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라는 문제는 국어영역의 단골 소재입니다. 떼어 놓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단어들도 아닌데, 그 단어들이 모여 만들어진 시는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답답한 기분을, 수험생 시절을 지나왔다면 너도 나도 느껴봤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시에 '정답'이 있을까요? 시를 오지선다형으로 풀어온 우리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자리잡은 명제가 새삼 의문스럽습니다.
😏시를 읽을 때는 '나 뭐 돼'라는 자세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젠가 그런 뉴스를 본 적이 있어요. 모의고사인가 수능인가에 출제된 국어영역 문제를, 그 작품을 쓴 작가더러 직접 풀어보게 한 거죠.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작가가 찍은 답은 거의 다 오답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러한 기현상을 보고, 국어영역의 신빙성에 심오한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문득 해답을 찾은 것만 같습니다. 시를 읽는 데 누구나 옳다구나 여길 정답은 없겠구나, 하고요.
시는 종종 문장으로 하는 예술로 여겨지곤 합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시詩'를 쳐 보면, '자연이나 인생에 대하여 일어나는 감흥과 사상 따위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표현한 글'이라는 분명한 뜻이 나옵니다. 감흥과 사상에 과연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요?
명징한 정답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 온 지난한 수험 시절이 시로 향할 수 있는 우리의 흥겨운 발걸음을 단단히 막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시를 '나 뭐 돼'라는 자세로, 그저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다면, 무던한 인생 속에 불쑥 찬란한 영감이 피어 오르는 순간을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제 삶이 부끄러웠던 윤동주
교보 생명 빌딩에 걸린 윤동주의 '자화상' 전문입니다. 수험생 시절 '죄책감'이라는 정답으로 배워 왔기 때문일까요.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을 차마 버리지 못하는 시의 내용이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윤동주는 1917년에 한반도 북쪽 경계 넘어에 있는 중국 명동성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이 오기 전 일본에서 28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는 어려운 시절, 시를 쓰며 생의 의미를 찾아가려 했던 윤동주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윤동주가 살았던 시절에는 태생과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마음껏 미워하고 차별하고 탄압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이처럼 험악한 세상을 고운 말씨에 담아내고자 하는 꿈을 지키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가끔 그의 문장도 길을 잃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세상을 사랑으로 노래하려는 시도가 가당키나 한 것인지, 너무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그저 시와 글을 쓰며 수수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의 꿈을 파렴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나름대로 치열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여기고 싶었는데, 돌아보니 제가 한 일이라곤 그저 태평하게 앉아 쓰고 또 쓴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옆의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서서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이 윤동주는 밉고 또 미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윤동주는 손으로 움켜 쥘 수 없을 정도로 멀지만 분명하게 제 존재를 반짝거리며 알리고 있는 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한 번 더 세상을 사랑해 보기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처럼 제가 '나 뭐 돼'라는 자세로 윤동주의 시를 읽어내린 문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처참한 시절을 살아낸 그의 고민이 오늘날 청춘에게는 어떠한 위로를 전하고 있는 걸까요. 삶의 이유를 찾으려 고민하는 젊은 시절의 낭만이 애달플 수밖에 없는 건 만고의 진리인 걸까요.
🍃타인의 고통이 스민 자리에 모로 누워보며
사실 윤동주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한데요. 그의 시를 읽을 때면 늘 애처로운 마음이 들면서도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마음으로 물씬 스며들어오는 것만 같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쯤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윤동주의 시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뉴니커 분들은 이 시를 어떻게 읽으셨나요? 마음 속에 스며든 그 감상과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윤동주의 문장이 여러분의 마음에 아로새긴 저마다의 답일 겁니다.
저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습니다.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의 이유를 젊은이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저 혼자만의 아픔을 홀로만 겪는다고 생각해 버릴 찰나, 젊은이의 시야에 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쓸쓸한 여인에게 어느새 마음이 동합니다. 여인의 고독에 스스로의 고통이 문득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여인이 자리를 떠나고, 젊은이는 여인이 누웠던 자리에 모로 누워보며 간신히 안온을 찾습니다. 연민의 외피를 입은 어렴풋한 사랑을 알아채는 순간, 젊은이의 세상은 간신히 살아봄직한 곳이 됩니다.
윤동주의 시가 아름다움으로 여전히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그의 시선이 비단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짧은 생애를 마칠 동안 자신의 젊음을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데 바쳤습니다. 아득히 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 시를 읽은 뉴니커 분들도 저마다의 어려움을 이고 지고, 각자의 어려운 생을 지나고 있을 주변의 타인들을 돌아보며 잠시나마 마음에 사랑을 채우시는 기회가 되셨길 바라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