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책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진짜 이유(feat. 완독병)

우리가 책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진짜 이유(feat. 완독병)

작성자 초희

초희의 책GPT

우리가 책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하는 진짜 이유(feat. 완독병)

초희
초희
@shooin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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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로 전국의 서점가가 들썩이고 있어요. 수상 소식이 있던 저녁, 여러 서점 사이트가 마비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을 땐 정말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죠. 아무래도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을 번역 없이 우리말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너도 나도 뜨겁게 벅차올랐던 게 아니었을까요?

🌊 제2의 한강의 기적

뜨거웠던 밤이 지난 다음 날, 책에 1도 흥미가 없던 친구가 덜컥 교보문고에 가자고 했어요. 정말이지,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 이름 붙일 만큼의 신드롬이 아닌가 싶었어요. 평소 책 전도사를 자처했기에, 흔쾌이 동행길에 나섰지요.

간밤의 소란은 교보문고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 주는 듯 했어요. 한강 작가의 책은 온 데 간 데 없고, 그의 아버지가 저술한 책만이 덩그라니 매대에 올려져 있었죠. 친구와 저는 실망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서점을 돌아보기로 했어요.

서점을 돌며 친구는 노벨상 소식 이전에는 한강 작가의 이름마저 몰랐다며 부끄러워 했어요. 그러면서 어떤 작품부터 읽어야 하냐고도 물었죠. 저는 무턱대고 친구를 위로하기 시작했어요. 한강 작가를 처음 안 게 너만은 아닐 거라고, 책을 좋아하지 않는 건 그저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문득 궁금해 졌어요. 왜 한국인은 독서량에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잊을 만하면 한 달에 한 권도 읽지 않는 성인의 독서량을 운운하며 세기말 분위기를 조성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왜 남들이 입을 모아 그러하다라는 것에 쿨하지를 못하는 걸까.

🙄 책과 멀어진 이유, 완독 강박

친구는 책을 읽으려 번번이 노력했는데도 매양 실패했다며 울상을 지었어요. 책의 효용에 대해서라면 24시간도 넘게 떠들어 댈 수도 있었으나, 꼭 책을 읽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지는 않기에 묵묵히 그 고민을 들어줬죠.

책을 추천해 달라는 친구의 말에 이것 저것 집어 들어 건네기도 했어요.

친구가 '책GPT'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 줬을 정도로, 저는 매대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쉴 새 없이 이 책 저 책을 권했어요. 친구는 그 중에서도 알랭드 보통의 '불안'에 무척이나 마음이 이끌린 듯 했죠. 그런데도 살까 말까를 한참 망설였어요. 전에 사 놓았던 책을 미처 읽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 때 아 차, 싶었어요. 찾았다, 우리가 책과 멀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독서 기록을 쉽게 할 수 있는 '북적북적'앱, 9월 기준 독서 현황

책의 내용을 한 번에 기억하는 방법, 책의 내용을 절대로 까먹지 않는 방법, 언젠가 보았던 독서 관련 유튜브 썸네일들이 뇌리를 훅 스치고 지나갔어요.

우리는 책을 너무도 '완벽하게' 읽어내려고만 하는 건 아닐까요?

완독 강박인 거죠. 무엇이든 손해 보고 싶어하지 않는(일정 시간을 들여 이 만큼 무얼 했으면, 그 만큼 가시적으로 '정량적으로' 무얼 얻어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 바쁘다 바빠 우리의 근성이 책과의 거리를 한없이 늘이고 있던 것이죠.

📚 다독의 첫 걸음, 병렬 독서

친구는 어떻게 그렇게 책을 많이 읽냐며 물었어요. 한 달에 3권 정도라, 그리 많은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웠지만, 저는 '완독병을 버리고 병렬 독서'를 해야 한다'라고 넌지시 그 비법을 알려 줬어요.

저도 한 때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대학원을 졸업한 지 얼마 안되어 독서 모임을 시작했을 때였죠. 함께 모임을 하는 언니들은 직장을 다니면서도 한 달에 책 5권을 거뜬히 읽어냈어요. 그래도 명색에 인문학 전공자인데, 크게 자극 받은 저는 열을 올리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죠. 웃프게도 그 열등감이 저를 독서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해 줬어요.

돌이켜 보면, '지적 허영심'이 결코 나빴던 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꾸역 꾸역 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책과 나 사이의 적정한 관계의 농도를 찾아냈기 때문이죠.

📖🤩너도 나도 텍스트힙 하기를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숏츠 보듯이 이것저것 기웃거려 본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천천히 딱 맞는 책을 찾아보셨음 해요.

책의 매력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속도가 한없이 느려진다는 거에요.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누군가의 낯선 사유에 귀를 기울여 보는 거죠. 그러다 보면, 부정적이고 힘겨운 생각만으로 펑 터질 것만 같았던 머리 속에 숨구멍이 트이는 느낌이에요.

누군가는 말하죠.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요. 그런데 그런 마음을 새로이 먹으려면 새로운 생각의 연료가 있어야 하잖아요. 저는 그 연료를 책에서 얻어요.

어렵게 어렵게 우리 곁에 온 한강 신드롬,
책의 매력에 흠뻑 취해 우리 사회가 다채로운 사유 속에서 유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

앗, 표지 이미지는 GPT에게 "최근에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후로 한국에서는 때 아닌 독서 열풍이 불고 있어, 이런 현상을 잘 표현한 이미지를 생성해 줄래?"라고 했더니, 그려 준 것입니다. 태극기 고증은 살포시 눈 감아 주기로 해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열린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 북토크에 간 날

P.S.
저는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주저없이 '한강'이라는 두 음절을 뱉곤 했는데요.
제가 읽은 책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대의 차가운 손, 한강 디에센셜, 흰, 희랍어 시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입니다.
처음 읽으신다면, 희랍어 시간을 추천드려요.
좀 더 한강 작가의 오리지널리티를 느껴 보시고 싶으시면 소년이 온다를 추천드립니다.
(그런데 한강 작가님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어보길 추천하셨다고 해요.)
디에센셜에 수록되어 있는 산문 중에 어릴 적 '종이 피아노' 이야기도 정말 좋답니다. ❤️

*'MBTI로 보는 조선 사람들' 연재를 잠시 멈췄습니다. 출간이 내년 예정인데 뉴닉에 중복해서 쓰는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리더라고요. 탈고되는 시점에 다시 연재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 때까지는 조금은 힘을 빼고, 제가 좋아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들을 해 보려 해요.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