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대선 후보 총정리 (2)] ‘노동운동의 전설’부터 ‘아스팔트 보수’까지, 김문수 이력 총정리

[2025 대선 후보 총정리 (2)] ‘노동운동의 전설’부터 ‘아스팔트 보수’까지, 김문수 이력 총정리

작성자 뉴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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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대선 후보 총정리 (2)] ‘노동운동의 전설’부터 ‘아스팔트 보수’까지, 김문수 이력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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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기 전에는 뭐했대?: 김문수 후보의 주요 이력

김문수는 1951년 경북 영천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빚보증에 실패하면서 열 살 무렵부터는 서울에서 판잣집 단칸방에 살며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김문수는 힘든 환경에서도 공부를 놓지 않았고,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진학했는데요. 대학 입학 직후부터 김문수의 삶은 ‘운동가’로서의 길로 빠르게 들어서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정희 정부의 3선 개헌에 반대하며 무기정학을 받은 김문수는, 대학에서도 유신독재에 맞서다 2차례나 제적당했어요. 이후 그는 ‘책상’ 대신 ‘현장’을 선택했는데요. 1975년 청계천의 피복공장에 위장취업해 미싱사와 재단보조공·보일러공으로 일하며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하는 방식으로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어요. 

이후 그는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한국노총 남서울지부 청년부장 등을 맡아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노동운동을 펼쳤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서울지역노동운동연합 지도위원 등을 역임하며 1980~90년대 노동계의 ‘전설’로 불리게 돼요.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수감과 고문을 겪었고, 고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고. 비슷한 시기 노동운동을 했던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는 김문수를 “운동권의 하늘 같은 선배”로 회고하기도 했어요.


정치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대?: 김문수 후보의 정치 경력

1980년대 중반까지 ‘혁명’을 꿈꾸며 노동 현장에서 활동하던 김문수는 옛 소련 등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현실 정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요. “혁명의 시대는 갔다”는 판단 하에, 운동을 제도권 정치로 이어가기 위해 1990년 민중당을 창당했지만 14대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당은 해산됐는데요. 이후 1994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권유로 민주자유당(현 국민의힘)에 입당하며 보수 정치에 입문하게 돼요. 이런 선택을 두고 노동계에서는 ‘변절자’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고요.

김문수는 보수의 ‘험지’로 꼽히는 경기도 부천 소사에서 15~17대 총선에 출마, 3번 연달아 당선돼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수도권 전철 복복선 개통, 수도권 급행열차 도입 등 지역 기반을 다졌는데요. 특히 2004년 총선 당시 공천심사위원장을 맡아 보수정당의 물갈이 공천을 이끌며 “죽을 각오로 한나라당을 청소하겠다”는 말로 주목받았어요. 

2006년부터 2번 경기도지사를 지내면서는 수도권 통합요금제, GTX 기획, 광교·판교 신도시 개발, 삼성 반도체 평택캠퍼스 유치 등 굵직한 사업들을 추진했고요. 직접 택시를 운전하는 등 민생 행보도 이어갔어요. 다만 임기 말 재정 부실과 이른바 “도지삽니다” 논란 등으로 거센 비판을 받았어요. 이후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밀렸고, 2016년 총선에서는 대구 수성갑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에게 대패하며 정치적 타격을 입었어요. 이어 2018년 자유한국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더불어민주당 박원순 후보에게 크게 패했고요.

이후 김문수는 점점 강경 보수의 길로 이동하면서 극우 진영의 전광훈 목사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고, 사랑제일교회 집회에 참석하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요. 2020년엔 자유통일당을 창당하며 ‘아스팔트 보수’ 이미지가 강해졌어요. 그러나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엔 노동운동가 경력을 살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됐고, 이어 고용노동부 장관까지 맡게 됐고요. 하지만 경사노위 위원장 시절엔 사회적 합의를 단 2건만 도출하며 성과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고, 장관 재임 시절에도 정치적 논란은 끊이지 않았어요.

김문수가 다시 대중적 조명을 받은 건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였어요. 당시 국회 긴급현안질의에서 “불법계엄에 대한 단체 사과를 요구한다”는 야당의 요구에 유일하게 사과를 거부한 인물로 화제가 되며 강성 보수 지지층으로부터 ‘꼿꼿문수’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여론조사에서 보수 대선주자 지지율 상위권에 오르기 시작했어요. 결국 국민의힘 대선 경선에서 안철수·홍준표·한동훈 후보를 제치고 최종 후보로 선출됐고요.


그동안 논란은 없었어?: 김문수 후보 관련 논란·의혹

‘김문수’하면 가장 먼저 따라오는 건 이른바 “도지삽니다” 논란인데요. 2011년 김문수는 소방서에 전화를 걸면서, 당시 무슨 이유로 전화를 걸었는지 묻는 소방관의 질문에 자신이 김문수 도지사라는 말만 반복했어요. 소방관의 관등성명을 요구하며 “내가 도지사인데 대답을 안 하냐?”며 ‘갑질’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요. 이후 김문수는 경기도 소방재난본부를 통해 해당 소방관들의 징계조치를 간접적으로 지시했고, 여론이 크게 나빠지자 이를 철회했는데요. 14년 전 일인데도 아직까지 조롱의 대상이 되는 만큼 김문수의 정치적 이미지에 크게 악영향을 미친 사건이에요.

이뿐만 아니라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19 검사를 위해 동행을 요구한 경찰관을 향해 “내가 김문수다”, “나 국회의원 3번 했다” 등 발언하며 이를 거부해 논란을 빚었어요. 해당 내용이 담긴 영상을 직접 올리며,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했다는 비판이 컸고요.

김문수는 여러 극우·뉴라이트 발언으로도 연이은 논란에 휩싸였어요. “일제시대 때 선조들의 국적은 일본”, “노조가 자살 특공대를 만들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총살감”, “김구의 국적은 중국”, “제주 4.3은 폭동” 등 발언으로 거센 비판을 받았는데요. 김문수의 역사관·노동관과 시대착오적인 인식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어요.

이 밖에도 폭행 치상 사건·코로나19 집합금지 명령 위반 전과가 있고요. 이를 경선 토론회 과정에서 지적받기도 했어요. 가장 최근에는 한덕수 후보와의 단일화를 두고 국민의힘 지도부와 큰 갈등을 빚었어요.


대선 후보로서의 강점과 약점

강점 👍

  • 노동운동가 전설이라는 상징성: 김문수는 흔치 않은 ‘노동운동가 출신 보수 정치인’이에요. 1970~80년대 직접 현장에 들어가 위장취업을 감행하고, 한일도루코 노조위원장을 맡으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이력은 지금도 강한 상징성을 갖고 있어요. 특히 보수 진영에서 노동 이슈를 다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도층과 실용적 보수를 원하는 유권자에게 차별화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자산이기도 해요.

  • 검증된 보수 정치인 이미지: 국회의원 3선, 경기도지사 2선, 고용노동부 장관까지 거치며 행정과 입법을 두루 경험했다는 점에서 ‘검증된 보수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아요. 비리 관련 의혹이 제기된 적이 거의 없는 데다 최근 보수 진영 유력 정치인들이 휘말린 ‘명태균 게이트’에서도 비껴 있었고요. 오래 활동했지만 구설에 비해 ‘정치적 생존력’을 유지해 온 점은 보수층 유권자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는 대목이라고.

약점 👎

  • 강경 우파와의 밀착, 반복된 논란들: 노동운동가 출신이라는 초반 경력과 달리, 최근 수년간 보여준 극우·뉴라이트 성향의 발언과 행동은 오히려 김문수의 중도 확장성을 크게 가로막고 있어요. 전광훈 목사 등과의 공개적 연대, 그리고 여러 막말성 발언은 중도·진보 진영의 큰 반감을 사고 있고요. 과거 “도지삽니다” 사건과 코로나 검사 거부 영상 공개 등도 ‘공직자 자질’에 의문을 던지는 주요 이슈로 꼽혀요.

  • 단일화 논란 속 드러난 당내 갈등: 경선 이후 당무우선권을 가진 대선 후보가 되었음에도,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갈등은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한덕수 후보와의 단일화 요구를 거부하고, 일정을 전면 중단한 사건은 ‘대선 후보로서의 책임감’과 ‘조정 능력’에 의문을 남겼다는 지적이 나오고요. 당 내부에서도 ‘단일대오 형성에 적합한 후보인가’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분위기예요. 본선 경쟁력에서 불안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큰 요소인 것.

by. 에디터 오월 🍕
이미지 출처: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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