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아주 지긋지긋했습니다. 아휴. 너무 더웠고, 정말 더웠고, 심각하게 더웠습니다.
덥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더웠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말마따나 여러모로 아쉬운 계절입니다.
해낸 것과 해내지 못한 것, 계획한 것과 실행한 것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죠.
여름의 끝에서 전하는 안부 인사입니다.
안녕들하신가요.
이번 여름은 괜찮으셨나요?
소리는 상대적인가
넷플릭스에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매회차엔 이런 내레이션이 나옵니다.
출처 : 넷플릭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드라마에서도, 철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문장입니다(라고 배웠습니다).
철학자 조지 버클리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요. 지각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보는(더 나아가 육감적인 방식으로라도 느끼는) 과정'이 없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영화 <올드보이>엔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은 주인공 오대수가 나옵니다. 오대수에게 '음식(혹은 먹을 것)=군만두' 뿐입니다. 오대수와 같은 사람은 "군만두가 아닌 음식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는 거죠.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군만두가 아닌 물만두도, 샛노란 단무지도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나요? 나의 인식과는 무관하게 현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요? 내가 못 느낀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너무 게으른 게 아닐까요?
귀 기울이기
출처 : unsplash
복잡한 철학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현실 세계로 저 문장을 끌어와보면 '가청 범위'라고 표현됩니다.
응급실 11곳에서 퇴짜를 맞고 1시간 만에 병원에 도착했으나 1달째 의식 불명이 된 28개월 아이의 사연. 4m 높이의 공사 현장에서 떨어진 인부가 1시간이 넘도록 응급실을 찾다가 사망한 일. 안약인 줄 알고 순간접착제를 눈에 넣은 남성이 응급실 20곳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까지. 이처럼 백기투항하는 응급실은 점차 늘어났고, 그렇게 늘어나는 하얀 깃발 아래에서 절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후두둑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우리는 그 '절망을 보며 절망'했죠.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20240901 주간동아發 최성락 박사님의 칼럼 <돈이 좋아 자기 피 파는 사람은 없다>에 나온 말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구구절절 맞습니다. 문제는 시스템입니다. 한 개인이 아니라 구조가 문제입니다. 구조에서 본질과 책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선택권을 배제시킨 구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응급실을 거절당한 사실 그 자체'보다 '왜 거절당할 수밖에 없었는지'가 더 중요한 겁니다.
박주영 부장판사의 말(하단 참고)*을 빌리자면, 세상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부조리하면서도 또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선의가 동시에 존재하는, 참으로 불가해한 곳'인데, 그러한 세상은 '한 개인의 욕망과 탐욕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조리한 시스템의 '선량한 피해자'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가도 제 때에 적절한 처치를 받지 못했던 분들이죠. 응급실의 문 앞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그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지극히 평범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응급실 뺑뺑이를 도는 우리의 이웃이 '결코 무언가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