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88회 – “민주주의야, 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너를 아직도
작성자 성민이
읽는 라디오 다시!
다시! 88회 – “민주주의야, 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너를 아직도
1
지난 방송에서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에 통과된 이후 광장은 점점 비워져 갈 것이다’고 얘기했었습니다.
그런 제 얘기를 비웃듯 광화문에는 상상 이상의 사람들이 다시 보이며 뜨거운 열기를 이어갔고, 남태령에서는 농민과 시민의 활화산 같은 연대로 기적과 같은 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모습들을 멀리서 지쳐보며 부끄럽기도 하고, 뜨겁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한 복잡한 감정들이 일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2008년 광우병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서의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같았던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경찰 차벽을 넘기 위한 모래주머니를 실은 차량이 경찰에 막혀서 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에 수 백 명의 사람들이 곧장 남영동까지 달려가서 모래주머니를 손으로 들고 오기도 했고
경찰과 대치하며 몸싸움을 벌이는 상황에서 경찰들이 구령에 맞춰 함성을 질러대자 시위대는 영화 속 전투장면을 흉내 내면서 더 큰 함성으로 맞서 경찰의 기를 눌러버리기도 했고
도로를 활보하는 시위대 때문에 차량운행에 방해가 되는데도 시위대를 향해 응원의 경적을 울리며 함께 하는 운전자도 있었고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사장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던 ytn 앞을 지나는 시위대를 향해 ytn 조합원들이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건물 위에서 날려 보냈던 감동적인 순간도 있었습니다.
매일 밤새도록 싸우면서도 지치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고 정말 흥겨웠습니다.
2016년 박근혜를 끌어내기 위한 투쟁에 이어 2024년 윤석열을 잡아들이기 위한 투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저는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나선 시민들과 제도권 야당이 선봉에서 싸우는 듯한 모습에 넌지시 그 한계를 걱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한계에 갇히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거침없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지금의 투쟁에서 제가 2008년을 추억하고 있을 때, 대중들은 지금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과거의 달콤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쓸데없는 잔걱정만 늘어간다고 했는데, 제 꼴이 딱 그렇습니다.
2
세상에서 한 발 떨어져 만나는 사람 없이 살아가고 있고
세상과의 소통수단인 sns마저도 부실해서 세상소식이 잘 들려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는 대중의 에너지는 이곳에까지도 전해집니다.
남태령으로 달려가 밤새도록 같이 싸우고
안국역으로 달려가 장애인들과 함께 길 위에 드러눕고
하청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한 모금이 이어지고
전태일의료센터 건립추진위 홈페이지는 너무 많은 이들이 접속해서 다운되고
여성농민 생산자 협동조합 홈페이지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사람들이 몰리고
단수로 물이 끊긴 농성장에는 생수통들이 배달되고
겨울의 추위를 온몸으로 견디는 농성장에는 털장갑과 목도리 등이 전달되고
그리고 제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연대의 흐름들이 이어지고 있겠죠.
광장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은 주저 없이 달려가 그들의 동지가 돼주고 있었습니다.
미얀마에서, 홍콩에서, 우크라이나에서, 팔레스타인에서 싸우고 체포되고 죽어가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응원했던 것처럼
이 땅의 민주주의가 차갑게 식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뜨거운 소식들을 접하면서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 소식들을 열심히 마음속에 담아두렵니다.
그렇게라도 그 에너지와 연결될 수 있다면
저는 그들과 동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3
2008년 촛불집회에서 좀비처럼 매일 밤을 지새우며 뛰어다녔더니
경찰은 소환장을 보내왔고 구속영장 신청과 기각, 그리고 재판이 이어졌습니다.
“범법행위는 끝까지 추적해서 책임을 물겠다”던 경찰의 약속은 지켜졌고
“승리하는 그날까지 함께 하겠다”던 시민대책위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서서히 세상에서 밀려나서 외톨이가 돼버렸습니다.
2016년 다시 환하게 열린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그 에너지를 만끽했지만
다시 광장이 닫히고는 외톨이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제 또 한 번 광장이 열렸지만 그 광장에는 선 듯 발길이 가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한 발 떨어져서 그 에너지를 느끼고 있을 뿐이죠.
영화 공각기동대나 매트릭스에서는 네트와 연결된 인간(또는 사이보그)들이 종횡무진하며 활발한 활약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어느 곳이 가상의 현실이고 어느 곳이 실재하는 세상인지 고민하기도 하죠.
시골마을 외곽에서 홀로 조용히 지내고 있는 저는 그저 인터넷을 통해 부실하게나마 세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을 들끓게 만드는 엄청난 에너지가 가상공간을 통해 제게도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연결된 순간, 이곳은 광장의 한복판이 되는 것이고 저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광장이 다시 닫히면 또 외톨이로 돌아오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이 에너지를 오롯이 느끼며 그들과 함께 한다는 마음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2008년 집회에서 유명하게 떠돌았던 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여, 너는 나를 잊겠지만,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지금 이 말을 돌려주고 싶네요.
“민주주의야, 너는 나를 잊었지만, 나는 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여의도에서 때창으로 불린 ‘다시 만난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