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아무 문제 없다

인생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아무 문제 없다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인생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아무 문제 없다

나나
나나
@naneunn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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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이장애가 내게 남긴 것 중 가장 큰 것, 바로 여유다. 이전에는 뭔가 내가 정한 기준과 목표가 명확해야 하고, 이걸 이루지 못하면 지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러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다. 고등학생 때 나는, 내가 워커홀릭으로 살아갈 줄 알았다. 소위 말하는 갓생. 외국어도 10개 넘게 하고 싶었고, 그냥 tv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학생 때도 여러 가지 꿈을 꿨다. 지금 모습과는 전혀 다른.

그치만, 인생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도 아무 문제 없다. 중간에 좀 아픈 과정을 겪었지만,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애초에 인생을 ‘예상’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목표와 열정을 가지고 사는 건 좋다. 그런데 그 목표와 열정이 집착과 강박이 돼서는 안 된다. 취업 성공, 다이어트 성공, 입시 성공 등등.. 우리에게 넘어야 할 관문과 지켜야 할 지표가 너무 많다. 올곧이 따라 가야 할 길도 너무 많다.

그 길을 (거의) 다 지켜왔다가, 갑자기 29살에 휴직을 했을 때, 나는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다. 적어도 다녀 오면 평판 정도는 무너져 있겠지 생각했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근데 전혀 아니다. 예측치 못한 29살의 휴직을 겪었지만, 나는 돌아와서 좋은 팀장을 만났고, 여전히 열심히 업무를 하고 있다. 물론 편견을 갖고 보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그치만 그 편견을 대하는 내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눈빛에 신경 쓰며, 내 평판을 잘 관리하기 위해 애썼다면 이제는 그렇지 않다. 물론 당연히 사회성을 잃었다는 건 아니다. 그냥 나는 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는 그냥 다른 사람의 몫이다. 나는 내가 힘들 때 ‘유재석도 안티가 있다’는 말을 종종 떠올린다. 국민 MC, 인성으로도 능력으로도 인정 받고, 그 자리를 오랜 기간 지켜온 그 사람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는데 내가 어떻게? 만족시킬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래봤자 내 스트레스고, 내 손해다. 사람들에게 잘보이면 좋겠지만, 그게 압박이 되고 강박이 될 필욘 없다.

또, 이렇게 예측치 못한 휴직 덕에 사람도 얻었고, 결론적으로는, 아주 개인적이지만 결혼을 한다. 앞서 가족 이야기를 간단히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항상 짐 같았다. 놀랍게도 서류상 이혼은 아니지만 내가 2~3살 무렵 별거해서 교류도 없는 부모님, 그래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아빠. 본인은 노력했겠지만 그게 나에게 사랑으로 전달되지는 않았던, 내가 이해할 순 있지만 사랑할 순 없는 엄마. 이런 여러 배경 떄문에 나에게 ‘가족’은 짐이고, 오히려 가지고 있어서 상처 받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하는 존재, 그러나 내게 상처만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정말 좋아하지만, ‘결혼’을 하면, 가족이 되면 그 사람과는 멀어질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서류상 속박되기 싫었다. 동거는 좋지만 결혼은 싫다고,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사귀고 있던 애인에게 줄곧 말했다.

그래서 크게 결혼 생각이 없었다. 지금의 남편과 이 이야기를 몇 년간 했었다. 그는 결혼 생각이 있지만, 나와 헤어지면서 꼭 결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건 진짜 결혼이 아닐 거라고 했다. 동거라도 좋다고 했다. 그냥 옆에 있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내가 밥은 못 먹지만 디저트는 먹으니까 그걸 따라다녀주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봐주는 그를 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사람을 이렇게 좋아하는 내가, 결국 내 마음의 문 가장 끝은 못 열어서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거였는데, 이렇게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믿으면 내 인생이 너무 외롭지 않을까?

막말로 이 정도로 나에게 힘을 준 사람이면, 설령 내 신뢰가 바위처럼 무너져 후회하더라도, 그래도 믿어봐야 내 인생이 의미 있지 않을까 싶었다.

배탈이 났는데도, 내가 음식을 혼자 절대 못 먹으니까, 자기가 아픈데도 꾸역꾸역 음식을 먹고 화장실에 가던 그 날.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기껏 용기내서 먹고, 운동을 안 할 자신은 없어서 안양에서 서울까지 1시간을 걷던 그날. 같이 걸어주는 그에게,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이 있으면 결혼이란 걸 해봐도 괜찮겠다고 얘기했다.

물론 이 얘기가 ‘비혼은 사랑으로 극복 가능해!’ 이따위 메시지를 전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으려던 이유는 결국 사람을 좋아하지만,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었는데, 그걸 그가 바꿔 준 거다.

어찌됐든 나에게 너무 큰 변화다.

여전히 목표와 지표에 초조해 하지만, ‘안 되면 말고’라고 생각하는 내 모습. 여전히 엄마가 어렵지만 새로운 ‘가족’을 선택하고 믿어 보려는 내 모습.

인생이 예측대로만 흘러갔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