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이장애가 나에게 준 것들

식이장애가 나에게 준 것들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식이장애가 나에게 준 것들

나나
나나
@naneunn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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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너무 부정적인 얘기만 한 것 같다. 물론 뭐, 식이장애가 긍정적일 순 없으니까.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식이장애지만, 그래도 나에게 남긴 것도 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게 됐다.

나는 나 자체로 소중하다. 예전에는 이 말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55kg의 나도, 30kg의 나도 소중하다. 외형은 상관 없다. 내가 나를 사랑해줘야 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뭔가 눈치 보지 말고, 내 자신의 행복을 향해 달려야 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 그런 것보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데 시간을 써야 한다. 내 자신을 돌봐야 한다.

나는 인복이 많다. 내 주변에 얼마나 좋은 사람이 있는지 알게 됐다.

이게 제일 크다. 사실 내가 식이장애를 고백했을 때, 주변인의 반응에 많이 놀랐다. 함께 울어주는 친구, 이래저래 정보를 찾아 보내주는 친구, 본인도 바쁘지만 연락 빈도를 늘려준 친구. 나열할 순 없지만 정말 고마웠다. 다른 지역에 사는데도 내가 사는 곳에 올 일이 있으면, 결혼식에서라도 마주치면 커피라도 한 잔 사주면서 요새 잘 지내고 있는지 따뜻하게 물어줬다. ‘얼마를 먹어야 적절한 걸까?’ 환장할 고민에 본인은 식단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찾아봐 주고, 내 건강에 적신호가 왔을 때 관련 정보를 찾아 기사를 보내줬다. 밥이 무서워서 못 먹는 나에게, 서X웨이에는 가벼운 메뉴가 있다고, 남들에게는 간식거리지만 내가 덜 무서워하면서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아주고, 최근 내 상황이 많이 나아져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자 울어줬다. 수험생이라 바쁘고, 다른 사람과 연락을 지속하지 않지만 내게는 가늘고 길게 연락하면서, 바쁜 시간을 쪼개 밥도 함께 먹어줬다. 본인의 트라우마를 들려주며, 내 아프고 어두운 얘기를 들어주며 괜찮다고 얘기해 줬다. 내가 걱정되지만 직접적으로 묻지는 못하고, 그래도 기웃기웃거리며 내게 힘이 돼줬다. 내가 회복세를 보이고 음식을 잘 먹자, 진작에 맛있는 거 좀 사줄 걸이라며 많이 먹으라고 따뜻한 말을 건냈다. 내가 나 자체로 소중하다고, 조금 먹어도 괜찮다고 얘기해줬다.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말에 상처받는 내게, 혹시나 비슷한 상처를 줄까봐 많이 고민했고, 내가 식이장애 이야기를 들려 주자 나에 대해 알게돼서 좋다며 사랑 고백(?)을 해주기도 했다.

내가 생각보다 친하지 않다고, 가깝지 않다고 여겼던 사람들인데도 내 얘기를 들어주고, 신경써주는 사람도 참 많았다. 위에 쓴 이야기는 한 문장당 한 사람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이 사람들 외에도 힘이 돼준 사람이 정말 많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나는 인복이 참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사람들을 보고서라도 얼른 나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 사람들에게 더 좋은 에너지를 줘야지, 생각했다.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

뭐든 미리미리하고,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막 뛰어난 건 아니지만, 사실 인생에서 나름대로 성공만 해왔다. 대단한 성공을 한 적도 없지만, 눈에 띄는 실패를 한 적도 없다. 그래서 멈춘 적도 없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고, 주변을 돌아보고, 일도 잠시 쉬어가며 깨달았다. 잠시 쉬어도 되고, 그렇게 미리미리 하지 않아도 되고, 너무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인생, 그냥 내가 행복하면 된다. 다 필요 없다.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식이장애지만, 이미 겪은 걸 어쩌나. 식이장애가 내게 남긴 좋은 것들이라도 바리바리 안고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