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친구 주현이를 잃었다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18년 친구 주현이를 잃었다
식이장애가 앗아간 가장 끔찍한 건 사람이다. 물론 나는 건강도 잃었고, 2년간 누릴 수 있는 것도 많이 못 누렸다. 상담 선생님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흔하고 소소한 기쁨 중 하나가 삼시세끼 먹는 행위라고 했다. 먹을 걸 좋아하는 난데, 그걸 2년간 잃었다니 너무 슬펐다. 그래도 나에게 제일 크게 다가오는 상실은 사람을 잃은 거다.
귀신도 무엇도 안 두려운 내가 제일 무서운 건 먹는 행위였다. 몸무게도 무섭고, 칼로리도 무섭고. 근데 누군가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싫었다. 사람들이랑 약속을 하면 밥을 먹어야 되니까 약속을 가급적 피했다. 앞서 말했듯 이상하게 살 쪄도 되는 날, 빠져야 되는 날등을 정하고 그 패턴에 맞게 약속을 잡기도 했다. 그치만 빠져야 되는 날 안 빠지면 그 다음 날 무조건 빼야 되니까, 미리 약속을 잡아뒀다가 혼자 마음이 요동치기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퇴사할 무렵 사람들과의 약속이었다. 나는 그래도 첫 회사에서 꽤 인정 받는 편이었고, 발도 넓었다. 퇴사한다고 하니 밥을 사준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 밥을 못 먹어서 커피만 마신 사람도 많다. 나는 밥을 적게 먹어야 되는데, 큰일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강박이 절정이었을 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담이었다.
내가 식이장애인 걸 그나마 드러낼 수 있었던 건, 남편 외에는 가까운 친구들 뿐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족과 그다지 가깝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누가 뭐래도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있었는데,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연락 끊기지 않은 가장 오랜 친구, 주현이다.
주현이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났다. 같은 반이었고, 같은 영어 학원을 다녔다. 같은 중학교를 갔고, 수학과 과학을 잘하던 주현이는 나에게 과학을 열심히 가르쳐 줬다.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고등학교는 달라졌지만, 힘들 때는 어김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고3 때 수시로 6개의 학교에 지원했는데, 논술 한 곳 빼고는 전부 학생부, 입학사정관제였다. 그런 전형들은 1차 합격, 2차 합격으로 나뉘는데, 나는 한 곳 빼고 1차에서부터 다 떨어졌다. 붙은 곳이 한 곳 있어도 최종도 아니고, 모든 곳을 떨어졌다는 상실감은 컸다. 학교 친구들은 위로한답시고 ‘너는 그래도 XX대 붙었잖아’라고 했다. 최종도 아닌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더 우울했다. 이 이야기를 주현이한테 털어놓자, 주현이는 그날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바로 달려와서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같은 고3, 자기도 힘들 텐데 내 얘기를 따스하게도 들어줬다.
수능 전 날 나는 너무 부담돼서 엉엉 울면서 주현이에게 전화했다. 자기도 수험생이면서, 주현이는 그날도 나한테 달려와서 맛있는 걸 사줬다. 배스킨라빈스에 가서 내가 원하는 맛 다 고르라고, 파인트를 사줬다. 수능 전 날이라, 차가운 거 먹으면 배 아플까봐 그 날 먹지는 못했지만, 수능 끝나고 먹은 그 아이스크림은 너무너무 따뜻했다. 냉동실에서 바로 꺼낸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다.
그런데 식이장애는 그런 주현이도 앗아갔다. 아까 말한 퇴사 시즌에, 주현이랑 다른 친구랑 셋이 약속이 있었다. 주현이가 그나마 편하니까, ‘너무 많이 먹어서 힘들다’면서 약속에 가서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주현이랑 만나면 그런 날이 점점 많아졌다. 아예 먹지 않거나, 같이 카페에 가서 주현이는 샌드위치를 먹고, 나는 차만 마시거나 했다.
사실 나는 주현이랑 진짜 잘 먹으러 다녔다. 주현이 집에서 감자 파티라고, 감자튀김, 해쉬브라운, 맛감자 등등을 야식으로 펼쳐 놓고 먹었던 날도 있고, 어떤 날은 막창에 떡볶이까지 나오는 세트를 먹고, 와플도 시켜 먹고 공차도 시켜 먹고.. 혈당이 올라 둘다 꾸벅 꾸벅 졸 정도로 먹기도 했다. 근데 내가 변했다.
물론 안 먹는 게 잘못은 아닌데, 나는 그러면서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이를 테면 아웃백가서 먹는 양을 얘기할 때, 주현이가 스테이크 큰 거랑 파스타랑 시키자고 하면 ‘스테이크 210g에 파스타 먹으면 충분하지 않냐’고, 2인분으로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커플 동반으로 여행을 가면 고기를 어떻게 살까 얘기하는데, 나는 양을 적게 잡으려 했다. 주현이는 듣다가 “그래 우리 많이 먹는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했다. 심각한 일은 아니지만, 작게 작게 내 강박은 우리 관계에 불필요한 생채기를 냈다.
그러고 나서 뭐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이런 모습의 내가 피곤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주현이는 내 연락에 답이 뜸해졌다. 그러다가 주현이는 잠시 개인적인 일로 고향에 내려갔다 왔고, 그 뒤로 나는 주현이를 볼 수 없었다. 바빠서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친구와는 만나는 걸 SNS로 봐버렸다. 그러고 며칠 뒤 우연히 발견한 게, 주현이는 내 맛집 인스타그램 팔로우 취소를 하고, 본인의 팔로워에서 내 본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했다.
꼭 식이장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모르는 실수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치만 애초에 연락이 뜸해지다가 그렇게 된 거라, 내 식이장애가 조금씩 낸 생채기 때문일 거라 추측할뿐이다. 주현이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내기도 했다.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있으면 알려달라고. 주현이는 그 카톡을 그 다음 날 읽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니까 이해해 주길 바란 적도 있었다. 주현이가 나와 만났을 때, 내가 식이장애로 힘들어 하자 갑자기 다른 친구와 통화를 하더니 1시간만에 집에 가기도 했다. 서운하기도 했다. 그치만 내가 아프다고 꼭 남에게 이해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걸 바랄 순 없었다.
나는 뭐 지금 남편 외에는 제대로 된 연애를 한 적은 없어서 전 애인 관련 인터넷 각종 밈과 썰에 공감하지 못했다. 근데 요새 주현이가 나한테 그렇다. 미안하기도 하고, 당연히 내 병을 이해해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도 있고..
그렇게 내 식이장애는 내 18년 친구를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