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도 패딩을 입고, 겨울에는 바지 안에 수면바지를 입었다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여름에도 패딩을 입고, 겨울에는 바지 안에 수면바지를 입었다
식이장애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 내 정신 상태도, 사람도, 머리카락도, 수분기도, 살도, 체온도 앗아갔다. 머리카락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빠졌다. 나는 한때 머리숱이 되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제 고무줄을 4번 돌려 묶어도 고무줄이 남았다. 묶을 수가 없었다.
물론 묶을 필요도 없었다. 아니, 묶으면 안 됐다. 묶으면 목 뒤가 너무 시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추웠다. 여름에 베트남에서 하루 종일 걸어다녀도 거의 땀을 흘리지 않았다. 가디건은 물론이고, 긴 바지 긴 팔 티에 경량 패딩을 입고 다녔다. 에어컨이 세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약 2년을 그렇게 지냈는데, 그래서 올해 여름이 유난히 더웠다. 매년 더워지지만 2년간은 더위를 못 느꼈어서, 거의 이민 온 것 같았다. 집에서는 에어컨도 틀지 않았다. 식이장애를 겪는 와중에 이사를 했는데, 이사 첫 날 집 손 볼 곳이 있어 관리사무소장님과 수리공이 왔다. 7월 말, 한창 더운 날이었다. 에어컨 좀 틀라고 하시는데, 틀 수가 없었다. 가디건을 입고 있어도 나는 너무 추우니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지만, 나는 에어컨을 틀 수가 없었다.
맞는 바지 사이즈가 없어서, 추워서, 벨트를 가장 졸라매도 바지가 남아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바지를 2겹씩 입어야 했다. 마른 사람들을 위한 쇼핑몰에서 꽤 타이트한 옷을 사도, 그 안에서도 XS을 골라 사도, 그 바지를 입을 때도 수면바지를 안에 껴입어야 사이즈가 맞았다. 경악할 노릇이었다
치마를 입을 때는 추위가 아니더라도 살색 스타킹은 신을 수 없었다. 수면바지를 입고 그 위에 스타킹을 신어야 했어서, 늘 검정 타이즈만 신었다. 핫팩이 없으면 살 수가 없었다. 숏패딩을 입고 그 위에 롱패딩을 또 껴입었다.
근데 진짜 웃긴 게, 그렇게 껴입고도 나는 걷기 강박을 버리지 못해 한겨울 새벽을 걸어다녔다. 영하 20도든 뭐든 상관 없었다.
강박을 입고, 강박을 걸었다. 원래 더위를 많이 타서 여름을 싫어하던 내가, 여름에도 추워서 더 추운 겨울이 싫어졌다. 사실은 그냥 이런 내가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