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백 VIP였는데요, 이젠 아닙니다

아웃백 VIP였는데요, 이젠 아닙니다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아웃백 VIP였는데요, 이젠 아닙니다

나나
나나
@naneunn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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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양소는 탄수화물일 거다. 고기도 좋지만, 결국 고기 먹고도 K-후식 볶음밥을 먹어야 마무리되는 민족이 한국인 아닌가? 심지어 탄수화물인 떡볶이에 탄수화물인 면사리를 추가하고, 탄수화물인 볶음밥으로 마무리해야 된다. 탄수화물은 종류도 다양하다. 밥, 빵, 떡, 면 등등… 근데 다이어트를 하려고 하다 보니, 그놈의 ‘저탄고지’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결론은 그거다. 탄수화물 먹으면 살 찐다고. 아, 물론 저탄고지는 죄가 없다는 걸 먼저 말하고 간다. 저탄고지를 ‘이렇게’ 받아 들인 게 문제였던 거다.

어쨌든, 나는 원래도 밥은 좋아하진 않았다. 부대찌개 외에는 애초에 한식보다는 양식파였다. 순위를 매기자면 면>빵>떡>밥 정도였을 거다. 다이어트 초반에는 그래서, 부대찌개를 먹으러 가서 밥은 안 먹고 라면사리만 먹었다. 밥을 참는 건 나한텐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면을 참는 건 고역이었다. 나는 아웃백을 지독하게 많이 갔다. 사실 나는 화장도 잘 안 하고, 옷에도 별 관심도 없었다. 돈 드는 취미도 없다. 내 취미는 음악, 심지어 노래여서 뭐 딱히 악기를 사야 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가끔 연습실 대관료가 나오는데, 그것도 친구들과 나눠 내면 비싼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학생 때도,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내 최애 음식은 아웃백이었다. 친구들이 흔히 나를 생각하면 떠올리는 키워드는 ‘아웃백, 음식, 호캉스’ 이 정도였다. 유일하게 돈 투자하는 취미(?)랄까.


아웃백의 풀네임은 사실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지만, 사람들이 아웃백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아마 빵과 투움바 파스타일 거라 생각한다. 부시맨 브레드는 흔히 ‘아웃백 빵’이라 불리고, 투움바 파스타는 필수다. 당연히 나한테도 그랬다. 부시맨 브레드는 무조건 리필에, 기본 제공 망고 스프레드 외에 초코 소스와 블루치즈 소스를 추가해 먹었다. 투움바 파스타도 그 두꺼운 면을 진득한 소스, 통통한 새우와 양송이 버섯에 곁들여 먹으면 그만큼 행복한 맛이 없었다. 물론 스테이크도 시켰다. 하지만 가끔 돈이 부담이 되거나 친구들과 가면 스테이크를 안 시키는 경우는 있어도, 투움바를 안 시킨 적은 없다. 내 최애 음식인 ‘면’ 중에서도, 나는 냉면이나 쫄면, 우동, 라멘 등은 크게 선호하지 않았지만, 라면과 파스타에는 말 그대로 환장했다. 야식으로 먹는 라면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다. 학생 때 남자친구와 야식을 먹는 게 습관이었는데, 그때 제일 많이 먹던 게 ‘라롯막’이었다. 라면, 롯데리아, 막창. 누군가 한 명이 출출하면, 야식을 제안할 때 하는 말이 ‘라롯막’ 중에 하나를 외치는 거였으니까 말 다했다. 파스타는 그야 말로 언제든 땡기는 최애 메뉴였다. 입맛이 한식보다는 양식파에 가깝던 나는, 한식집은 두 끼 연속 안 가도 파스타는 같은 집에 가서 같은 메뉴를 두 끼 연속 먹을 수 있었다. 꼭 투움바 파스타만이 아니더라도, 그냥 흔한 파스타 집의 흔한 파스타 메뉴도 사랑했다.

그런데 그런 탄수화물이 살이 찐단다. 그래서 나는 탄수화물을 점차 포기했다. 그래서 아웃백은 가지 않았다. 식이장애가 시작된 초반에 아웃백을 가면, 나는 그 한 끼를 먹고 나서 하루 종일 몸무게를 재곤 했다.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지금은 좀 바뀌었지만, 아웃백 멤버십은 그 당시 일반/VIP가 있었고, VIP는 레드/블랙으로 나뉘었다. 블랙이 더 높은 등급이다. 기준은 당연히 방문 횟수와 금액. 나는 몇 년간 VIP 블랙이었다. 일주일에 1번 이상 아웃백을 간 적도 있다. 그런데 투움바 파스타가 나에게는 아주 무서운 음식이 되면서, 아웃백을 가지 못했다. 나는 파스타가 너무 맛있어서, 가면 맛있게 먹고 싶은데, 살 찔까봐 많이 먹을 수 없고, 그래서 즐겁지가 않았다. 그래서 안 갔다.

나는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몇 년간 유지하던 VIP 블랙을 박탈당한 것은 물론이고, 그냥 아예 아웃백 멤버십을 지우게 됐다. 점차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매주 들어가기도 하던 그 앱을 그냥 그렇게 지웠다.

좋아하던 파스타는 무섭고 피해야 하는 음식이 됐다.


[덧붙이기] 그렇지만 지금도 내 최애는 빵이다

앞서 내 글을 읽다가 의문이 드는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 탄수화물을 두려워한다고 해놓고, 폭식하면 빵을 먹는다고 했으니까. 나는 요새는 빵>떡=면>밥 정도의 선호를 보인다. 떡보다 면이 높은 것 같긴 한데, 이건 왔다갔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정확한 이유는 나도 모른다. 애초에 식이장애를, 내가 왜 걸렸는지도 모르겠는데, 파스타는 안 되고 빵은 되는 이유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치만 내가 추측하기로는, 파스타는 주로 주식으로 먹으니까 매번 보려니 피하게 됐고, 빵은 아주 가끔 후식으로 먹으니까, 당 충전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집착하게 됐던 것 같다.

아, 그리고 지금은 다시 파스타도 잘 먹는다. 이번 달 어떤 주에는 아웃백을 한 주에 3번이나 갔다. 갈 때마다 투움바 파스타를 시켜 먹었다. 행복했다. 아직 마구 걸어다니는 걸 보면 식이장애가 완치되진 않은 걸 수도 있지만, 그럭저럭 방법을 찾아가고 있는 걸까.

내년에는 다시 아웃백 VIP가 될 것 같다.


애초에 본연의 나란 무엇일까? 그치만 나는 일단 나다운 나로 돌아가보겠다

거지 같고 힘든 식이장애 속에서도, 결국 아주 조금씩 희망은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