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이가 울었다

은정이가 울었다

작성자 나나

나는 식이장애 환자(였)다

은정이가 울었다

나나
나나
@naneunn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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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식이장애라는 거,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아마도? 그치만 사람도 안 만나고, 애인도 같이 내 식이장애에 가스라이팅(?) 당한 상황에서, 내가 스스로 식이장애임을 느낄 계기는 흔치 않았다. 회사 사람들이 그나마 나에게 말랐다, 왜 안 먹냐 등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저 무시했다.

흐릿하긴 하지만 섬은 존재한다. 날씨가 좋아서 선명한 날도, 안개에 가려 잘 안 보이는 날도 있지만 섬은 분명 존재한다.

균열은 갑자기 찾아왔다. 진짜 웃기게도, 나는 소소하게 맛집 인스타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팔로워 수가 많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협찬을 받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협찬 받은 돈까스 집을 가야 되는데, 그게 내가 다니던 학교 근처였다.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는 친한 동아리 후배 은정이(가명)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가서 나는 소식좌가 되었다고, 거의 돈까스를 먹지 않고, 진짜 후기를 남길 수 있을 정도로 한 입만 맛보았다. 후배에게 내 몫을 거의 넘기고, 카페를 갔다. 그곳에서 빵을 먹었는데, 거기에서 은정이가 울었다.

이게 그 날의 그 빵은 아니다

사실 식이장애라고 해서 적게 먹고, 안 먹는데, 사람이 살아가려면 계속 안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래서 내가 '거식증' 말고 '식이장애'라는 표현을 쓰는데, 물론 사람들마다 다를 순 있지만 나는 거식증과 폭식증을 함께 앓았다. 거식이 며칠 계속되면, 그 뒤에는 폭식을 한다. 하루에 식빵 한 쪽만 먹고 버티는 날이 3일쯤 되면, 4일째에는 갑자기 큼직한 쿠키 7개를 한 자리에서 먹어 치우곤 했다. 밥을 먹고 나서, 크림 가득한 음료 큰 사이즈와 내 얼굴만한 프레첼 5개를 한번에 먹기도 했다. 사람마다 폭식하는 종류와 양상이 다를 테지만, 나에게 폭식의 대상은 주로 '디저트'였다. 밥은 먹지 않고, 달달한 것만 찾았다. 후에 상담 선생님이 얘기하기로는 밥을 먹지 않으니까 인슐린인지 뭔질 올려야 해서 당을 찾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이 날도 나는 돈까스를 먹지 못했으니, 빵을 열심히 먹었다. 은정이랑 같이 있으니까 폭식을 하진 않았지만서도, 은정이가 나중에 집 가서 먹으라고, 협찬으로 밥 먹었으니 자기가 빵 사주겠다고 하며 포장해준 빵까지 뜯어서 그 자리에서 먹었다. 근데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이건 XX Kcal' 이러고 먹었다. 은정이는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나에게 식이장애 아니냐고 했다.

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니고 싶었다. 근데 은정이의 얼굴을 보니까 그럴 수 없었다. 사실 은정이랑 엄청 절친까진 아니고, 친한 후배였는데, 나는 유독 동생들한테 약하다. 근데 내가 좋아하는 동생이 나를 걱정하는 게 보이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갑자기 할 말이 없더라. 그리고 은정이는 얘기했다. 자기 친구 중에 식이장애는 아니지만, 뭔가 마음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를 도와주지 못했던 게 자기는 힘들었다고. 그런데 내 모습을 보니, 돈까스 조금 먹는 것까지는 진짜 소식좌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칼로리 계산하고 이런 걸 보니 내가 그런 강박에 시달리는 거 아니냐고 했다.

은정이가 울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게 머리에 갑자기 강하게 다가왔다. 나는 동아리 CC였어서 은정이도 내 애인을 알고 있었다. 내가 혼자 극복하는 게 힘들면 내 애인이나, 내 친한 동아리 친구에게라도 자기가 얘기할테니 주변 사람들이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나는 일단 그건 괜찮다고 하면서도, 그냥 생각이 멍해지면서도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했다.

내가 은정이를 만난 건 5/5이고, 은정이는 5월 말 생일이었다. 그 때까지 병원을 가든 상담을 받든 하기로 했다. 은정이가 그렇게 날짜까진 안 정해도 되고,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때까지 받겠다고 했다. 그때 그렇게 은정이 앞에서 약속하지 않으면, 그 핑계라도 없으면 나는 상담을 안 받을 것 같았다.


식이장애의 나는 불행하기도, 동시에 행복하기도 했다. 남편과 나는 사진을 잘 찍지 않지만, 한 번 찍을 때 여러 장 찍는다. 이 날 이 곳에서 사진을 보면, 저렇게 행복해 보이면서도 한껏 남는 나의 상의가 돋보여 슬프기도 하다. 저 사진은 신나는 제주도 여행인 한편, 내가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도 슬프도록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