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할 뻔한 팜팜이의 🪨 돌잔치 3화 - 울트라리스크 & 로우리턴

😱 망할 뻔한 팜팜이의 🪨 돌잔치 3화 - 울트라리스크 & 로우리턴

작성자 팜팜은행

팜팜이의 경제 초고수 양성 과정🏅

😱 망할 뻔한 팜팜이의 🪨 돌잔치 3화 - 울트라리스크 & 로우리턴

팜팜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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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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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니커! 팜팜이는 하마터면 돌잔치를 하지 못할 뻔했는데요,, 팜팜이네 집이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기 때문이죠! 어라라? 팔로워 좀 늘었다고 갑자기 개인적인 얘기를 시작하는 팜팜이?!

 

이건 개인적인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겪었던 얘기인데 바로,, IMF예요! IMF와 돌잔치가 겹쳤다는 사실! (사실상 공개된 팜팜이의 나이에 술렁거리는 장내 👥👤👥👤뭐야...👤👤👥👥👥웅👥성👥👥👤가만있자...👤👥👤👤...(웅성웅성)👤👥👥👤...(웅)(성)👥👥👤👤👥👤👥👥👤..)

 

실제 팜팜이네 돌잔치 사진

 

저번 글(https://newneek.co/@kaist2015/article/17465)을 꼭 읽고 오세요!

 

 

 

 

🚦 감독 똑바로 안 할래?

이렇게 기업들이 골골대고 있으면 똑바로 규제와 감독을 해야 했죠!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요 😢

 

 

1990년대에는 세계적으로 금융 자유화가 시작되었어요.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정부가 '🔎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정부 개입은 축소하고, 시장의 자율성은 확대하자!"가 핵심 기조가 되었어요. 1990년대에는 IMF와 세계은행도 개발도상국에 금융 자유화를 권장했죠.

 

 

출처=헬스조선 이슬비 기자

 

우리나라는 금융의 자유화를 위해 환율이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하고, 외국인도 국내 주식에 투자할 수 있도록 변경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어요. 여기서 살펴볼 것은 1991년 실시된 '금리자유화 추진계획'이에요. (그전까지는 정부가 금리를 직접 통제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

 

출처=매일경제

 

정부가 금리를 결정하고 경제를 꽉 틀어쥐는 '금융 억압'의 기조가 줄어든 건 좋았지만 문제는,, 은행권보다 비은행권의 금리가 더 빠르게 자유화되었다는 점이에요. 결과적으로 비은행권이 수신 금리(예금한 고객들에게 지불하는 이자)를 경쟁적으로 높이기 시작해, 고객들은 비은행권으로 많은 돈을 예금하게 되었어요. 얼마나 커졌는지 비은행권의 비중이 은행권의 2배나 되었죠!

 

https://joohyeon.com/173

 

은행권은 비은행권에 비해 제공하는 서비스의 종류와 담당하는 고객층이 넓은 반면, 더 엄격한 규제를 받아요. 규제가 적은 비은행권에는 🔎 지급준비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어요. 몰려드는 자금을 공격적으로 영업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겠네요!

 

 

또한, 회사채 시장에 대한 규제는 계속된 반면, 기업어음(CP)에 대한 규제는 철폐되었어요. 회사채와 기업어음 모두 회사가 돈을 빌리기 위해 발행하는 것인데 규제가 철폐된 만큼 회사들은 비교적 덜 깐깐한 기업어음의 발행을 늘렸어요. 그런데 문제는 회사채보다 기업어음의 만기가 짧기 때문에 금방 금방 갚을 날짜가 돌아왔다는 것이죠. 돈을 언제든 회수당할 수 있는 환경이었던 거예요!

 

 

'금융 억압' 시기를 거쳐온 은행들은 기업들이 튼튼한지 아닌지 꼼꼼히 따져보기보다는 국가의 지휘에 맞춰 자금을 퍼다 나르기에 바빴어요. 어차피 정부가 간접적으로 보증을 서줬기 때문에 위험도를 평가할 필요가 없었고 능력도 부족했어요. 그러다 너무도 빠르게 금융 자유화가 실시됨에 따라 민간의 자율적인 리스크 관리는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대표적으로 당시 우리나라 은행들이 했던 신용평가를 보죠. 전 세계 평균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후한 점수인데 이 때문에 위험도가 높은 대출도 서슴없이 행해졌어요.

 

https://joohyeon.com/173

 

또한, 금융을 감독하는 기구가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 신용관리기금 등으로 분산되어 있어, 이를 통합적으로 지켜볼 수 있는 금융 당국이 부재했어요. 금융 자유화를 위해 규제를 풀었으면 감독이라도 철저히 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 아주 높은 리스크, 낮은 리턴의 콜라보가 펼쳐졌어요.

 

출처=스타크래프트 위키

 

 

외부 환경도 좋지 않았어요.

 

 

 

 

☃️ 설상가상: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

원화의 가치가 하락해야 수출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그런데 당시 원화의 가치는 계속해서 높아졌어요. 왜냐하면:

 

  • 😍 외국인들의 쏟아지는 한국 사랑: 우리나라 금융 시장은 막 개방되던 때라서 외국인들의 국내 투자가 증가했어요. 그러니 원화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 원화 가치가 강해졌죠.

  • 🛍️ 수입 물가 잡아!: 원화 가치가 상승하면 수입품 가격이 낮아지죠? 물가를 잡기 위해 원화 가치를 일정 수준 위로 유지하려고 노력했어요.

  • 🇯🇵 일본 엔화 가치의 하락: 우리나라와 수출에서 경쟁하고 있는 일본의 화폐 가치가 떨어졌어요. 따라서 우리나라의 수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게 보였죠.

 

1996년 5월, 적정환율은 1달러에 982원 정도로 추정되었는데 실제 환율은 무려 780원이었어요. 원화가 엄청나게 고평가 된 셈! 수출 주도산업을 펼치고 있던 우리나라는 큰 타격을 입었겠죠? 이러저러한 이유로 우리나라는 무역을 통해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었고, 무역수지를 포함하는 개념인 경상수지는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악화되었어요.

 

출처=현대경제연구원, 한국은행

 

(그래도 그 이후에는 꾸준히 흑자폭이 유지되고 있어 천만다행 🥰)

 

1996년에는 무역으로 인한 손해가 GDP 대비 무려 -4.75%에 달했고 외국인들이 충분히 "이거 이거, 한국이라는 나라는 조만간 위험하겠는데?"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어요. 근데 그러면 원화 가치를 하락시키면 되는 거 아닐까요? 🧐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의외로 원인은 간단한데,,

 

https://joohyeon.com/170

 

'잘 몰랐기 때문'이에요.

 

당시 우리나라는 8%의 아주 낮은 단일 관세율을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입하는 양은 늘어만 갔고, 고평가된 원화 가치로 수출은 시원치 않았죠. 아무쪼록 값싼 물건이 들어오니까 물가는 잡히고 경제도 활성화되었지만 이는 "대내 균형을 위해 대외 균형을 파괴"한 아주 근시안적인 조치로 평가돼요. 김영삼 정부 시절 관세청장과 재정경제원 차관을 역임한 강만수는 훗날 "매년 원화 가치를 5% 정도씩만 절하시켰어도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라고 회고했죠.

 

 

IMF 외환 위기는 우리나라만 겪은 게 아니었어요.

 

1990년대 초반 아시아 국가들은 고성장과 개방 정책으로 해외의 자본들을 대규모로 들여왔는데 대부분의 부채가 단기로 달러를 빌려서 장기로 운용하는 구조였죠. 그러니까 달러는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계속해서 추가로 빌리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는데 이게 불가능하다면,,? 언제든 파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죠.

 

시작은 태국이었어요. 태국은 1997년 초까지 태국 바트화와 달러의 가치를 일정 비율로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태국 경제의 과열을 의식한 해외 투자자들이 태국 바트화를 대량으로 팔아치웠어요. 이에 따라 고정환율제가 붕괴되고 바트화의 가치는 대폭 하락했죠.

 

출처=investing.com

 

이에 따라 태국과 비슷한 구조(짧은 만기로 달러를 빌려 장기간 프로젝트에 투자)인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위기가 전파되었고 한국의 원화에 대한 불안도도 급격히 높아졌어요.

 

출처=한겨레 정의길 기자

 

 

😱 거짓말처럼 찾아온 위기

시작은 한보철강의 부도였어요.

 

출처=MBC 뉴스데스크

 

출처=경향신문

 

1997년 1월 24일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기사를 보시죠.

 

 

한보철강은 신공법, 신설비를 너무 과감하게 도입했어요. 이 과정에서 자금난을 겪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대한 돈을 빌렸죠. 포항제철을 한 번에 앞지르려고 했다고 하니, 한보철강의 야망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알 수 있죠.

 

최초의 투자금은 2조 7천억 원 정도로 책정됐어요. 아주 큰 규모죠? 그런데 공사를 하다 보니 돈이 더 들어가서 실제로는 두 배가 넘는 5조 7천억 원 정도가 소모됐어요. 한보철강의 자본은 900억 원 정도였으니, 실제 자기 몸집의 65배가량의 부채를 짊어진 셈이죠. 개미도 자기 몸집의 50배를 겨우 드는데 한보철강은 개미를 뛰어넘었어요! 🐜

 

당시까지는 몰랐어요. 이게 거대한 IMF 외환위기의 시작이 될 줄은,,

 

출처=서울경제 조민규 기자

 

이후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하기 시작해요. 부풀어오른 풍선에 구멍이 난 순간! 안에 있던 공기들이 끊임없이 빠져나가게 된 것이죠.

 

출처=https://m.blog.naver.com/qkr4966/188081764

 

달러 빚을 견디다 못한 우리나라는 결국 1997년 11월 21일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IMF에 자금 지원 요청을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실질적인 IMF 외환위기가 시작되었어요.

 

출처=동아일보

 

당시 우리나라의 공식 외환보유액은 242억 달러였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92억 달러에 불과했어요. (한때 39억 달러까지 급감했다는 기록도 있음!) 반면! 해외 부채는 무려 1208억 달러였죠. 1991년 391억 달러에 비해 3배 이상 늘어난 수치예요.

 

출처=KBS 박찬형 기자

 

 

위기의 원흉이라고 불리는 종금사는 대가를 치르게 되었어요. 많은 종금사들의 외환 업무가 중단되었고, 은행에 인수당했죠. 한때 30곳이 넘었던 종금사는 20세기가 끝날 무렵, 11개로 줄어들었고, 2024년 8월 1일 우리종합금융의 해산으로 완벽하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요.

 

출처=시사오늘 고수현 기자

 

피해는 온 국민이 나눠 지게 되었어요.

 

 

 

애초에 종금사가 이렇게 위험한데도 묵인한 데 정부의 문제는 없냐, 하는 문제도 나왔지만 흐지부지됐어요.

 

 

우리나라를 한바탕 휩쓸고 간 IMF 외환위기,, 이렇듯 모두가 고통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장점도 있었어요.

 

(마지막 화에 계속)

 

 

 

[팜팜이의 요점정리🥰]

 

  • 정부의 개입은 축소하고, 시장의 자율성은 확대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세계 곳곳에 퍼짐에 따라 우리나라도 금융 자유화를 실시했어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규제 완화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됨에 따라 더 많은 돈이 더 위험한 곳으로 몰리게 되었어요.

  • 정부의 비호를 받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금을 운용했던 국내 금융기관들은 금융 자유화가 펼쳐짐에 따라 민간이 자율적으로 시행해야 했던 리스크 평가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 높아진 원화 가치 때문에 수출에서 적자를 보고, 아시아에 금융 위기가 휘몰아침에 따라 우리나라는 안팎에서 모두 새는 바가지가 되었고, 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서서히 위기의 그림자가 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결국 1997년 11월 21일 IMF에 자금 지원 요청을 공식적으로 발표함에 따라 IMF 외환위기는 실질적으로 시작되었어요.

 

 

[참고 자료]

종금사로 둔갑한 지방 단자사의 폭주…그 끝엔 '국가부도의 날' 있었다
https://www.hankyung.com/article/2019010430411

 

[한보철강 부도] 은행빚 얻어 "무리수"..왜 부도까지 몰렸나

https://www.hankyung.com/article/1997012400271

 

'국가부도의 날' 유아인의 종금사는 너무 작게 묘사됐다

https://www.choic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775

 

[외환위기 ③] 금융감독체계가 미흡한 가운데 실시된 금융자유화 - 1997년 국내금융시장 불안정성을 키우다
https://joohyeon.com/173

🔮오늘의 행운 메시지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