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히고, 가라앉았다: 영화 <폭설> 비평

파묻히고, 가라앉았다: 영화 <폭설> 비평

작성자 엔케이

무비-잇

파묻히고, 가라앉았다: 영화 <폭설>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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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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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희가 신인 배우 시절 촬영했다는 영화 <폭설>이 드디어 개봉했다. 신인 시절의 영화가 일약 '스타덤'에 오른 뒤 개봉하게 됐다는 것, 어쩌면 그만큼 고심했던 제작 과정을 거친 영화인 것일까. 그렇단 것은 자연스레 수많은 복기와 수정을 거친 정교하고 아름다운 구슬과도 같은 작품일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은 경솔한 것일까? 그렇다. 예술영화라고, 독립영화라고 그들의 예술성을 미리 칭송하며 관람 전부터 나 자신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리는 것은 잘못이다. 예술영화가 꼭 예술적이지만은, 독립영화가 자신의 이야기를 적절히 전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기 때문. 그렇지만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이번 영화도 그렇게 반복된 실수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두 여성이 만나지만 끝에는 한 여성만이 남는다. 다시 말하자면, 만난 두 여성 중 한 명의 '상실'에 대한 나머지 한 여성의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이야기는 설(한소희 분)이 수안(한해인 분)의 고등학교에 전학을 오면서 시작한다. 설은 어릴 적부터 연기를 시작한, 이미 유명 연예인의 길을 걷는 존재다. 그와 반대로 수안은 예술고등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하며 연예인, 배우의 꿈을 꾼다. 꿈을 꾸는 사람에게 꿈을 이룬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호흡이 가빠지고, 땀이 삐질 나고, 긴장된다. 수안 역시 그렇다. 투박하고 정돈되지 않은 수안의 모습을 비웃는 동급생들이 있지만, 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인 걸까. 유명 연예인이라는 자리에 올라서 있지만 격 없이 자신에게 다가와 준 것 때문인 걸까. 그렇게 동경인지, 사랑인지 모를 수안의 마음이 자꾸만 자석에 이끌리듯 설에게 이끌린다.

수안과 설은 자꾸만 먼 곳으로 떠난다. 둘은 수안 어머니의 차를 타고 바다에도 가고 서울에도 간다. 수안은 면허는 없지만 설을 위해 어디서 배웠는지, 감대로 하는지 모를 운전 실력으로 운전대를 잡는다. 무면허 운전이 들통날까 불안하지만, 확실한 공간이 확보되는 자동차라는 것은 그들에게 정체성과 관계성의 불안함을 숨기고 서로에게 온전히 맞닿을 수 있는 수단이다. 연예인 신분인 설과 그렇지 않은 수안에게 남들과 다른 정체성, 다른 관계를 쉽게 내보일 수 없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공간 안에서는 그들에게 어떤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면허조차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그렇지만 설은 한순간에 홀연히 수안의 곁을 떠난다. 포근히 수안의 마음에 내린 설이 쌓아 올린 두께는 결코 수안을 따뜻하게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완전히 그녀를 짓누르고, 파묻었다. 마치 작은 눈송이 하나하나가 쌓여 가슴팍까지 그 중첩을 쌓아 올린 폭설과 같이. 그런 점에서 이 영화의 제목과 이야기의 관계 속 핵심은 '수안'이다. 설이 아닌. 영화는 설을 조명하지 않고 그 두께에 묻힌 수안에 집중한다.


파묻힌 수안이 어떻게 살아갔는가. 수안은 상실의 감정 속에서 설과의 관계를 어떻게 기억하고 그리워하나. 둘이서 서투르게 서핑 보드에 엎드려 물을 먹어댄 과거에서 비롯해 수안은 '서핑'이라는 매개체에서 그 때의 순간들을 회상한다. 수안에게 먼저 다가온 설을 밀어내고 부정했던 것이 그녀였기에. 관계를 회복할 여지 속에서 미성숙한 대처로 그 관계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던 그 과거를 후회하기 위해.

영화는 총 4개의 챕터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챕터마다 변하는 수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관람 포인트. 변화하는 수안이지만 설에 의해 파묻힌 마음과 관계는 여전하다. 어쩌면 영화가 끝날 그 순간까지도. 수안의 감정과 심리를 체화하고 은유하기 위해 영화는 다양한 장치를 사용한다. 개인적으로 아쉽게 느껴졌던 것은 그 심리 표현을 위해 너무 많은 것들이 사용됐다는 점. 영상은 아름답고, 로케이션은 그 영상에 잘 어우러졌지만 영화는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 않나. 특히, 하나의 중점적인 메시지를 가지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그 이야기를 성실하게 풀었는 지에 관한 부분에선 할 말이 많았다. '굳이'라고 생각이 들었던 요소들, 지나치게 관객을 긴장시키는 롱 테이크들은 때론 의미없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처음엔 배우라는 존재는 배우 이전의 사람과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말하는 듯하다. 카메라 앞에서 만들어진 감정을 연기하고, '나만의 연기, 나다운 연기'에 대해 갈망한다. 그 이야기에 주인공들 간의 서사가 적절히 잘 어우러졌는가. 그 인과관계는 충분한가. 한편으로는 느긋하게 파묻히는 수안의 감정 속에서 설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는 감정이 적절히 은유로 표현됐는가. 그런 점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감독의 의도를 의심하고 그것을 꺼내어 보기 위해 노력하는 관객들이 어쩌면 너무나 화려한 표현에 의지를 잃지는 않을 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적절한 표현들로 은근하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건네는 것은 영화가 할 수 있는 역할 중 하나다. 그러나 메시지 전달에 너무 많은 소음이 겹치면 관객들 입장에서도 이를 해석하고 고민하기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폭설>은 그랬다. 너무 많은 이야기와 요소들이 쌓이다 보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덮어버렸다. 자연스레 그 본질은 가라앉았다. 이 이야기가 수안이 설에게 파묻히고 가라앉는 것이라면, 그 파묻힘 속에서 방황하는 수안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았을까.

그 아쉬움에 2점이라는 평점을 매겼다. 그렇다고 '2점짜리 영화'라며 이 작품을 단편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보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점은 다를 것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 또한 다를 것이다. 여러 연출, 묘사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만의 매력과 아름다움은 분명 사라지지 않는다. <폭설>은 그렇기에 볼 가치가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