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 Anora>: 어떤 사람들.

<아노라, Anora>: 어떤 사람들.

작성자 정기훈

시네마 천국🎦

<아노라, Anora>: 어떤 사람들.

정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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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h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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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를 보고 달달한 로맨스 영화인 줄 알고 극장에 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스포일러를 하자면 이 영화는 로맨스 장르는 아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처럼 로맨스의 탈을 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영화로 봐야 한다. 무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션 베이커의 신작이다.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영화들 중에서 기생충과 더불어 가장 재미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런 영화가 개봉한지 2주도 되지 않아 상영관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안타깝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극장에서 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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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애니가 일하는 헤드쿼터라는 스트리퍼 클럽의 장면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애니는 러시아 출신의 이반을 손님으로 맞이한다. 애니와 이반은 서로의 합이 잘 맞아 수시로 만나는 관계로 발전한다. 손님과의 사적 만남은 금지라는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말이다. 이반은 애니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며 이 둘의 관계는 더욱 달아오른다. 이때, 이반은 애니에게 1만 달러를 제시하며 라스베이거스로 1주일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애니는 1만 5천 불을 제시한다.

 이는 장난기 가득한 이들의 사랑이 찐 사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관계가 완벽히 사랑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일말의 여지가 남겨진 것처럼 느껴졌다. 이 둘도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기분 좋게 결혼을 한다. 서로가 정말 사랑한 것처럼. 낭만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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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에 끊임없이 이들의 베드신이 등장한다. 활활 불같이 타오르는 이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였을 것이다. 동시에, 여느 노동과 마찬가지로 섹스라는 노동을 통해 나름의 삶을 지탱하며 남들이 하는 사랑도 하고,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것을 똑같이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도 보인다. 차이점은 일반적인 노동과 섹스라는 노동에서 오는 현실적인 괴리가 있을 뿐.

 션 베이커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이 이들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연결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라는 인터뷰를 했다. 이를 보면, 영화에서 나오는 섹스는 단순히 수위 높은 베드신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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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와 이반의 결혼 소식이 러시아에 있는 이반의 부모에게까지 알려지며 이들은 뉴욕에 거주하는 부하들을 부려 결혼을 무효화하려고 한다. 이반의 부모들이 재벌이라 스트리퍼 출신의 애니를 신부로 맞이하길 극구 꺼린다. 이반의 집에 부하들이 찾아오면서 영화는 소동극으로 접어든다. 부하들은 미국에 머무는 이반을 관리하기 위해 이반의 부모로부터 고용된 자들이다.

이들 역시 미국 백인이 아니다. 동향으로 봐도 된다. 애니는 결혼을 무효화 시키려는 이들의 말과 노력에 격노하며 반대한다. 고함을 꽥꽥 지르며 말이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동향으로서, 서로 챙기는 모습이 어울리지만 돈 좀 가지고 있다고 이혼이 아니라 결혼 무효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심각한 상황인데, 그 판에서 서로가 서로를 욕하고 쫓는 모습은 또 웃긴. 그런 블랙코미디가 휘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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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대치 모습과 대조된 차가운 사실이 있는데. 이들 모두 미국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 애니부터 갑부인 이반과 그의 집안 그리고 그의 부하들까지 모두 미국 밖에서 온 사람들이다. 심지어 애니의 친구들조차 미국인이 아니다. 한 명쯤은 미국 백인을 넣었어도 됐을 텐데. 션 베이커 참 치밀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미국 백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에 거주하는 타 인종, 그들의 이야기다. 여기에 돈의 적고 많음으로 발생하는 계급 차이까지 더해진 것이다. 서로 힘을 모아 살아가야 할 비주류인(이반의 부모는 논외로 하자.) 그들이 서로의 급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은 봉준호의 기생충에서 기택 가족과 문광 부부가 싸우는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한바탕의 소동 후에, 애니는 이반과의 결혼 무효화를 막기 위해 이반의 부하들과 이반을 찾으러 나선다. 이반으로부터 결혼 무효에 대한 반대 의견을 육성으로 직접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반을 찾기 위해 뉴욕 곳곳을 누비며 방문하는 장소들에서조차 미국 백인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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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다. 그 장소들은 그들과 비슷한 출신의 사람들이 오는 식당이나 장소로 보인다. 미국과 미국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에 사는 이방인들의 이야기라는 것으로 한정 짓기 위한 의도라고 보인다. 알고 보면 이 얼마나 차가운 영화란 말인가.

또한, 어떤 사람들의(이방인) 이야기라는 점을 부각하는 요소가 아노라의 가명 ‘애니’다. 아노라는 자신의 생업을 위해 미국인들이 기억하기 쉬운 애니라는 가명을 쓴다. 이반과 그의 부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들은 애니의 본명에 무관심하다. 애니가 자신의 본명을 말하지만 그들은 한 귀로 듣고 흘릴 뿐이다. 이름에도 관심이 없는데 이들의 삶에는 어떤 관심이 있었을까.

어디서 굴러들어 온 돌멩이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 인종의 용광로라고 일컬어지는 뉴욕과 미국이 사실은 타문화권 출신의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그들의 이야기 따윈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는 미국의 속 모습을 비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노라의 가명을 any와 동음이의어인 ani로 한 것 아닌가 싶다.

Anora

아노라는 철부지 이반으로부터 결혼 무효를 하자는 이야기를 육성으로 듣게 된다. 이반은 아노라를 모르는 사람인 양 대한다. 어떤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결혼 무효에 대한 사례로 아노라는 이반 가문으로부터 1만 달러를 입금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랑이라 믿었던, 믿고 싶었던 관계로부터 상처만 남은 아노라. 이런 그녀를 계속 봐왔던 인물이 있다. 극 초중반부터 이반 가문이 고용한 하수인 of 하수인으로 등장한 ‘이고르’라는 숨은 주인공이다. 이고르만 아노라 곁에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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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는 이반으로 인해 생긴 불신으로 이반 가문의 부하로 고용한 이고르를 믿지 않는다. 당연하다. 아노라는 그의 눈빛이 강간범의 눈빛이라며 경계심을 표한다. 하지만 이고르는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다며 아노라에게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다. 사실, 영화에서 이고르는 아노라의 시선으로만 보였다. 이에 적응해서 그런지 마지막이 다가올 때까지 이고르의 표정을 봐도 아노라 대해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애매했다.

아노라와 이고르의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관객들이 마지막까지 아노라의 심리에 동화되도록 하기 위함이 감독의 지도와 배우들의 연기 아니었을까. 아무튼,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도 관련되는 부분이니 마지막까지 숨죽이며 집중해서 관람하길 바라며 스포일러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노라>는 멜로 장르의 탈을 쓴 것처럼 보일뿐 전혀 그런 장르의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아니다. 큰 세상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구석에서조차, 어떤 사람으로부터 한 줄기 희망은 있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던지는 작품이다.

당신만의 '아노라'를 만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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