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선 의사라는 신이 인간에게 계시를 내린다. "검진을~ 받으라~" 그러면 인간은 쪼르르 달려가 '검진 의식(Ceremony)'을 받는다. 하지만 '정말 이 의식이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환자는 '검진 자체의 적합성'을 따져 묻지 않는다. 당연하다. 신의 계시는 곧 무조건적인 충성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의사가 받으라면 받는 거고, 까라면 까는 거다.
여기에 환자가 오래도록 서 있을 자리는 없다. 신은 환자와 딱 3분간 조우한다. 저자 김현아는 이 상황을 "진찰은 3분 만에 엉망으로 해치우고 그 시간에 검사로 이윤을 내는 구조"라고 진단한다.
실제로 약 4달 전, 광화문 인근 이비인후과에 간 적 있었다(스트레스로 인한 돌발성 난청 증상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에 의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선 환자들이 그득했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거의 맨 끝에 접수했다. 의사는 내 앞에 대기하던 약 20명을 단 50분 만에 해치웠다. 명분은 "직장인들 점심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피차 서로 질질 끌어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검사 시간은 한 2분, 진찰 시간은 1분 남짓이었다. 끝나고 다시 업무에 복귀했다. 돌아와서도 이상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신(神)은 이렇게 돈을 번다. 많은 신도를 동원한 박리다매 방식이었다.
심지어 신은 더 비싼 최첨단 기계를 선보이며 환자들을 각성시킨다. '돈 생각하시지 말고', '특별히', '건강이 최우선이니까' 등의 미사여구로 설득한다. 환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다. "아멘"
신의 시작은 정치였다
환자는 일종의 쳇바퀴 속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검사부터... 아, 다 받으셨어요? 그럼 다음엔 이 검사.. 이후엔 이 검사를... 아.. 큰 병원에 가보셔야겠어요... 그럼 또 이 검사.. 아 딴 병원에서 받으셨어도 안 돼요. 검사를 저희 병원에서 한번 더 받으셔야 진료를 보실 수 있으니까..." 같은 말을 듣는 게 일상이다.
피를 수차례 뽑고, 탈의를 했다가 입었다가, 오랫동안 대기했다가 잠시 신(神)을 조우하고 다시 오랫동안 대기하기를 수차례 반복해야 한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쏟아부어야 한다. 이렇듯 구원의 여정은 험난하다.
무언가 잘못됐다. 그렇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김현아가 말하는 단초는 바로 정치였다.
정치로 묶기 시작한 매듭을 비정치적인 방법으로 푸는 것은 어려웠다. 김현아가 되돌리고자 한 여러 문제들은 좌절되기 일쑤였다.
김현아는 몇 가지 오해와 우려되는 문제들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로봇 수술 기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환상', '안전한 약품에 집착하다간 금값인 약을 받아들 수도 있다는 우려' 등은, 그러나 결국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뉴스를 틀면 나오는 이른바 '의사들의 목소리'는 이렇게 왜곡된다.
진료 시간을 늘려주세요
그래서 '너가 말하고 싶은 게 뭔데?(What's the point?)'라는 물음에 답하겠다.
김현아가 최소한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어 하는 문제, 바로 '진료 시간 확대'다. 의사랑 더 오래 얘기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어디가 아픈지, 왜 아픈 건지, 어떻게 치료할 건지, 부작용은 어떤 게 있는지, 완치는 가능한지 등등.
얼마나? 최소한 15분. 진료 시간이 단 2분만 늘어도 우리는 조금 더 안전해질 수 있다. 서구 선진국 의료 시간 15분을 벤치마킹 해보자는 거다(핵심이 아닌 성차별, 선진국의 우월성 등 비본질적인 문제를 논하지 말자).
우리에겐 더 친절한 신(神)이 필요하다. 암울한 미래에는 더욱 그렇다. 의료가 비즈니스가 된 우리나라에서 신의 시간은 더욱 쪼개질 것이다. 쪼개고 또 쪼개진 그 파편을 비집고 들어가 환자는 진료를 받을 것이다. 더 짧아지고, 더 비싸지는 의료 비즈니스의 시대. 쪼개진 신의 시간에 온전한 인간의 자리는 없다. 말 그대로 산업화가 우려된다는, 김현아의 주장에 동의한다. 이쯤에서 '의료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