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은 고려시대 사람?
작성자 가영
나는야 대한고려인
고려인은 고려시대 사람?
디아스포라(diaspora)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처음에는 로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의미했다가 오늘날에는 다른 민족들의 망명, 이주, 난민, 이산과 같이 점차 포괄적인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단어입니다. 공식적 기록이 남아있는 한민족 최초의 디아스포라는 바로 고려인으로 이들은 1864년 이주를 시작해 올해 2024년은 바로 그 160주년이 되는 해예요.
"고려인"을 백과사전에 검색해본다면 구소련 붕괴 이후 독립 국가 연합의 국가들에 거주하는 한민족이라는 해설이 나와요. 하지만 고려인들의 기다란 애환의 역사와 망명길을 이 한마디로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죠.
1800년대 후반,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침입, 정치적 혼란과 대흉년을 비롯한 악재가 계속되면서, 특히 정치적 차별을 받았던 서북지역의 조선인들은 북으로 가 연해주에 정착합니다. 때마침 이들이 최초로 정착한 땅인 러시아 극동지역은 당시 청나라와 러시아제국이 주도권을 갖기 위해 다투면서 많은 혼란이 있던 곳이었거든요.(1858년 아편전쟁을 거쳐 1860년 러시아제국이 연해주 지역까지 지배하기 시작함) 이들이 자리를 잡자 소문이 나면서 이북지역 뿐 아니라 조선 전국 팔도에서 북으로 국경을 넘기 시작합니다. 그 수가 어느정도였나면 1890년에는 고려인이 연해주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였어요. 그곳에서 고려인들은 공동체와 자치기구를 구성하여 서로 협력하며 생활했습니다.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에서의 수탈을 피하기 위한 사람들 뿐 아니라 일제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어요. 고려인들은 독립군을 지원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그들이 세운 마을 신한촌에서 3.1운동을 지원하면서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지켜갔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고려인이 새로운 정착지에 융합되기를 거부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가 개척하지 못해 미지의 땅으로 남아있던 극동지역을 고려인들이 개척하면서 러시아의 인정을 받고, 러시아인과 조화롭게 살아갔으며 기독교를 받아들이기까지 했으니까요.
1917년 제정러시아가 붕괴하자 대부분의 고려인은 소련 성립을 위해 협력하였고, 1922년 러시아에선 혁명군이 승기를 잡으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은 고려인이 일본인의 스파이일지 모른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민족지도자를 처형하고 17만 2000여명에 달하는 고려인을 6000km가 넘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중앙아시아)으로 강제이주 시켰어요. 길고 지난한 강제이주 과정에서 25,000-30,000명의 고려인들이 추가적으로 희생되었고, 고려인은 무(無)에서부터 일궈온 자산을 전부 잃었어요.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오지를 개척하기 위해 소련 당국은 고려인의 도시 거주를 금하였어요. 그곳에 고려인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숙소는 사실상 없었고(우즈베키스탄에서 250 세대의 주택을 마련했지만 실제 이주한 가구는 16,272 가구), 잠잘곳을 구하지 못하면 겨울녘의 혹독한 중앙아시아 땅에 토굴을 파서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주가 끝났음에도 수많은 노인과 영아가 겨울을 버티지 못했고, 고려인 약 2만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사는 고려인의 경우 거주의 자유가 없었으며, 스탈린이 죽은 1953년이 되어서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공민권을 부여받았어요.
하지만 고려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강력한 공동체를 회복하여 집단농장(콜호즈)을 통해 농업의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제도 안에서도 자본주의적 사적영농제도를 실시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이 죽고 고려인에 대한 정치적 불신임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고려인들은 스스로 생존을 위해 언어, 문화, 외모, 사고방식을 비롯한 모든 생활 전반에서 러시아화를 시도했어요. 소련이 고려인들에게 조선어 교육을 금지시키기도 했죠. 따라서 강제이주 이후 태어난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해 지금도 한국어에 서툰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서의 체류를 위한 자격에 한국어 구사능력이 있어 소련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은 오늘날까지 고려인들의 한국 정착에 치명적인 문제로 남아있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러시아화하려고 했던 고려인들이지만, 그래도 전통만은 지키고자 햇어요. 한복을 입으며 명절을 쇠고, 배추 대신 당근을 이용해서라도 김치를 만들어 먹는 등 말이죠. 당근김치와 고려국시를 보면 알 수 있어요.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고려인은 또다시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휘말리게 돼요. 소련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같은 신생독립국으로 나누어지면서 해당 국가들은 러시아어가 아닌 원주민 언어를 '국어화'하고 민족주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토착 민족을 중심으로 국가가 개편되면서 자연히 고려인들이 설 자리는 점차 없어졌고, 이에 고려인들은 1) 새로운 직업을 선택하거나 2) 새로운 나라로 이주하는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됐습니다. 이주를 선택한 고려인의 경우 러시아로 재이주하거나 처음 자신들의 선조가 터를 잡은 연해주로 돌아갔으며 몇번의 이주와 재이주 과정을 거친 후 200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국내 귀환을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르렀어요.
마무리
이번화에서는 고려인이 누구인지, 어떤 역사를 거쳤는지 그 전반적인 흐름을 알아봤어요. 글을 다시 한번 보면서 도대체 고려인들이 얼마나 긴 거리를 이동한건지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보려 했는데요, 실패했습니다🥹
글을 다 쓴 지금 떠오르는 건 강제이주 당시 고려인들이 탔을 증기기관차의 이미지네요. 저는 평소에 <붕괴 스타레일>이란 게임을 즐겨 하는데 '개척'의 운명을 가진 주인공들이 증기기관차의 모습을 한 최첨단 은하열차를 타고 우주 끝과 끝을 누비며 개척을 이루어내는 내용의 줄거리를 가진 게임이에요. 가상의 이야기로만 가능할 줄 알았는데, '개척자'들은 실제 현실에서도 그것도 우리의 바로 옆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다음 시간엔 고향으로 돌아온 개척자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 현황을 간단하게 다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