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_농촌 소도시에 사는데요. 귀농한 건 아닙니다.
작성자 사서가옥
5만 도시에서 뭐 하고 지내?
프롤로그_농촌 소도시에 사는데요. 귀농한 건 아닙니다.
배경 이미지 출처: Karlo 2.1 AI Image Generator
저는 농촌 소도시에 삽니다. 여기 인구는 약 5만 명. 이게 어느 정도 되는 숫자냐면요. 수도권 전철 구로디지털단지역 하루 이용객 수랑 비슷하고요.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를 인구수 순서로 줄 세우면 170번 언저리에 자리해요. 서울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아파트 단지, 헬리오시티의 주민이 약 4만 명 정도라는데요. 거기의 1500배 정도 되는 넓이의 땅에 비슷한 숫자의 사람이 넓게 넓게 흩어져서 살고 있어요.
"귀농한 거야?"
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아요. 수도권에서 태어나 수도권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뒤로는 줄곧 서울에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농촌 소도시라니. 저를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제가 '내려간' 이유가 궁금할 거예요.
또, 농촌 소도시라는 공간에서 상상할 수 있는 직업 중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농부일 거고요. 아니면 공무원이나 귀여운 카페를 하거나... 게다가 경치 좋은 전원주택에 사는 거면 주말에 놀러가서 바베큐 파티할 곳 하나 생기는 거니 얼마나 좋아요? 저도 서울 살 때는 친구가 소도시에 내려가 산다는 말을 들으면 "야, 고기 꿉자" 얘기부터 나왔으니까, 알죠 그 마음. '리틀 포레스트' 감성 좋잖아요?
하지만 농사는 저랑 거리가 너무 멀어요. 일단 평생을 시티펄슨으로 살아서 땅과 하늘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는지라 농사하면 망해도 너무 거하게 망할 걸 알아서 귀농은 생각도 해본 적이 없고요. (집에서 화분 키우는 것도 힘든데 그걸 어케 함? 농업 종사자 여러분 진심 존경합니다 🙇.) 심지어 대학 때 힘든 거 싫다고 농활 한 번 간 적이 없는 정통파 시티펄슨입니다.
게다가 저는 지금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시티피플을 위한 각주: 여기도 아파트 있습니다. 그것도 꽤 많이. 아파트에서 논밭으로 출퇴근하는 분들 진짜 많음.) 전원주택 좋죠. 그치만 저는 아직 아파트가 좋아요. 아침에 마당 풀 깎을 시간에 자는 게 좋고, 뭐 고장나면 관리사무실에 연락하는 게 편하고... 아! 그래도 도시의 아파트랑 조금 다른 점이라면, 창문 밖을 봤을 때 옆 아파트 대신 앞산이 보이고, 새벽에 오토바이 소리 대신 닭이랑 산새 우는 소리가 들린다 정도?
갑갑한 도시 라이프에 지친 지인들에게 농촌 소도시의 낭만을 채워줄 수 있는 대답을 해주면 참 좋겠지만, 아닌 걸 어떡합니까. "농촌 소도시로 귀촌한 건 맞는데요. 귀농한 건 아니에요. 헤헤 😅." 하고 답하는 수밖에.
그러면...
"그런데 어쩌다..."
라는 질문이 이어져요. 귀농이 아니라면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을 하는 건가 싶은 거죠. 대부분은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긴 한데요. "어쩌다" 라는 표현에 '서울 살던 시티보이가 갑자기 지역에 내려가다니. 뭔가 단단히 실패했거나 어디 아프거나 한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어 있는 게 느껴지는 경우가 가끔 있어요.
처음엔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여기도 엄연히 사람이 사는 곳이고,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은 비수도권에 살고 있는데 "거기서 밥은 벌어 먹고살 수 있는 거야?" 하는 쪼로 물어보면 짜증이 나죠. 나도 내 짝꿍도 여기서 만난 친구들도 다 잘 먹고 사는데 그게 무슨 수도권 중심적으로 일그러지고 편향된 사고방식이람?
그런데 보고 들은 게 없으니 상상력이 부족한 거겠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저도 여기서 살기 전에 부모님이 귀촌하셨을 때 "와 이런 시골에서 무슨 재미로 산담. 난 아직 서울이 좋아" 했거든요. 거기서 뭘 할 수 있는지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일자리는 당연히 서울에 있는 거고, 사람은 당연히 서울로 가는 게 맞는 거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TMI: 부모님이 귀촌하신 도시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인구가 무려 2배나 더 많은 곳입니다. 게다가 거기는 꽤 핫한 관광지고요.)
아, 질문에 답을 하자면 "어쩌다는 아니고요. 여기 있는 회사에 원서를 썼어요. 다니고 싶은 회사 중 하나였거든요. 근데 덜컥 붙어서 짐 싸고 내려왔고요."
요렇게 얘기하면 "그러면 공무원...?" 하는 질문이 다시 들어와요. 공무원도 아니에요. 천천히 들려드릴게요.
서울피플들과 질답질답 하다보니 여기 사는 '우리'는 뭘로 돈 벌고, 무슨 재미로 사는지 우리 이야기를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됐어요.
왜냐면...
"와 나도 서울 밖에서 사는 게 꿈이야"
하는 말도 자주 듣거든요. 서울 밖의 삶. 좋죠. 저도 너무 좋아서 여기 4년째 살고 있고요. 앞으로 얘기를 풀겠지만, 다니고 싶어서 들어갔던 회사를 퇴사하고 1년이 지났는데요. 아직도 살고 있어요. 지금 직장은 서울에 있고요. "엥?" 하셨다면 조금만 기다리시라. 야금야금 풀어볼게요.
"귀촌? 완전 좋지!" 추천하고 싶지만 근데 이제 걱정이 되는 포인트가 좀 생기더라고요.
혹시... 관광지에서 잠깐 살아보고 "이게 사는 거지 😎" 하는 기억으로 말하는 건 아닌지?
혹여... '삼시세끼' 이런 거 보고 "낭만 가득 농촌 최고 🤗" 이런 생각 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여기 사는 저와 제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기로 한 거예요. 낭만과 미디어 마사지가 빠진 '찐' 농촌 소도시의 삶이 뭔지 알려주면 좋겠다. 그렇게 농촌 소도시에 대한 상상력을 좀 키워보면 우리 제대로 "귀촌 어때?" 얘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앞으로 두 가지 에세이로 찾아올 생각이에요. 순서는 생각 나는 대로. 맘이 가는 대로.
나는 이렇게 지내!: 인구 5만 소도시에서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제 삶을 이야기할게요.
너는 어떻게 지내?: 인구 5만 소도시에서 저와 함께 공간을 나누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볼게요. 가능한 골고루,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을 만날 생각이에요. 저처럼 귀촌한 사람, 여기가 고향인 사람,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닌 사람, 떠난 사람, 다시 돌아온 사람 등등...
맥북 하나 옆구리에 끼고 "5만 도시에서 뭐 하고 지내?" 던진 질문에 돌아온 답변들, 기대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