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생각하는 사람들 💭
모엘
7달 전•
그러면 왜 소수일 수밖에 없을까요? 그 이유는 많이 있겠죠.🫠
한국은 유교식 공동체주의에서 개인주의로 변모해왔어요. 물론 그 안에서 개인의 다양성과 자유를 존중하는 분위기는 생겼죠. 그러나 지금의 한국식 개인주의는 인터넷 문화와 결합되어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는 방향을 틀어막은 것 같아요. 우리는 더 이상 사회와 국가를 신뢰하지 않고, 민족정신과 애국심은 옛말이 되었죠.
그저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이해관계를 키워가는 건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더불어 종교에 대한 불신도 마찬가지죠. 지금의 현대사회는 과학이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신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죠. 사실(fact)과 논리가 중요한 지금 허구(fiction)와 믿음은 객관적이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어왔어요. 과학주의적 시각이 팽배해졌고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계속 나올 만큼, 인문학은 쓸모가 없다고 취급되어왔죠.🥲
그래서 우리는 "구도자"에 대한 비유를 들 수도 있는 거예요. 홀로 끊임없이 고독하게 진리를 구하고 실천하는 삶인 거죠. 이 사람들은 앞서 이야기했던, '사유를 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interests)를 키우는 개인주의'와 '사실과 논리만을 중시하는 과학주의'와도 외롭게 투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시민단체, 비영리단체, NGO 등을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사회적 소수자들의 입장에 서고 환경을 보호하는 입장에 서서 투쟁하는 사람도 당연히 선(善)의 위치에 있을 겁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시민단체 또한 집단의 이익에 의해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도덕적 개인들이 모이더라도 비도덕적인 집단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했죠. 어쩌면 이러한 이유로 선(善)을 계속 추구하기 위해서는 고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죠. 개인이 집단이 된다면 집단의 이익과 목적에 의해 변질되기 쉬우니까요.😮💨)
결국 위 내용에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선(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념을, 그리고 신념의 토대가 되는 종교를 끌어올 수밖에 없다는 거였죠.
마지막으로 칸트의 윤리학 <실천이성비판>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를 해볼게요. 칸트의 윤리학을 살펴보면 1) 영혼불멸을 가정하고 2) 신 존재를 요청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우리 인간은 유한하고 욕망과 경향성에 치우치기 쉽습니다. 아무리 선의지에 따라 도덕법칙을 실천하려고 해도 흔들릴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이 가진 선천적인 한계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칸트는 영혼불멸을 상정합니다.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유한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이 언젠가는 도덕법칙과 일치될 수 있다고 본 거죠. ☺️
이제 문제는 "행복"입니다. 선행을 하면 행복할까요? 나에게 손해가 오는 경우도 잦겠죠. 그렇기에 칸트는 신을 도덕적 존재로서 요청을 합니다. 내 영혼이 선을 실현하기 위해 무한히 도덕적으로 전진한다면 언젠가 내 선행에 보답을 해주고, 행복을 보장해줄 신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거죠.😇
조금 더 어려운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래서 칸트에게서 최고선(善)은 최상선과 완전선을 의미합니다. 최상선은 도덕법칙과 의지의 일치인 덕을 의미하고, 완전선은 덕과 행복의 일치를 의미하죠. 영혼 불멸과 신 존재를 요청하면서 최고선이 달성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이건 당연히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과학의 문제가 아닌 거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신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다시 요청의 형식을 취하니까요.🤔
그래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볼 수 있어요. 현생에서 행복을 기원하는 기복신앙보다는, 현생에서 신을 믿고 선행을 하며 천국에서 보상을 바라는 기독교가 더 나을 거라고요. 그리고 칸트도 사실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죠.🫣
네. 여기까집니다. 뭔가 내용이 쉽게 전달이 될지는 모르겠네요..ㅋㅋㅋㅋ 질문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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