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을 쌓아온, 아직 전하지 못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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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테이블토크

사회변화를 향한 레퍼런스

✍️ 30년을 쌓아온, 아직 전하지 못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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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다가온 일과 30년의 여정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와 이주민 인권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들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주와 관련해서 일하고 있고, 관련된 글을 쓰고 있는 이란주입니다. 1994년 한 주간지에서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발견했어요. 그때까지 저는 이주노동자에 대해 전혀 몰랐는데, 그 기사를 보고 처음 알게 됐어요. 느끼는 점도 많아서 무작정 그 기사에 나온 단체를 찾아갔어요. 제가 이주민을 위해 거창한 활동을 해야겠다고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아, 내가 할 일이 여기에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단체에 가서 청소하고 밥도 하면서 단체 사람들과 친해졌어요.

그리고 1995년에 부천외국인노동자의집이 생겼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어요. 당시 외국인산업기술연수생들이 명동성당 앞에서 농성을 하면서 사회가 크게 흔들렸죠. 연수생들이 들었던 피켓이 “때리지 마세요, 월급 주세요, 여권 돌려주세요”였어요. 그때 연수생들 임금이 월 200달러, 당시 환율로 16만 원 정도였어요. 국내 최저임금은 27만 원이었는데요. 이 농성을 통해서 연수생들한테도 최저임금이 적용되고, 건강보험도 적용됐어요. 이주민의 권리는 정말 악을 쓰면서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처음부터 당연하게 인정된 건 하나도 없었어요. 하나씩 하나씩 싸워가면서 권리를 확보해 왔어요.

이주노동자의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농성(기사 내용과 무관한 자료 사진) | ⓒ플랫폼씨

| 이주민과 굉장히 오랜 시간을 보내셨네요. 활동가로 일하실 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나요?

1995년부터 10년가량은 임금과 산재를 중심으로 한 노동 상담에 집중했어요. 그때는 이주노동자가 유입되기 시작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노동자 관련 상담이 많았죠. 일상이 가시방석이었어요. 사무실에 들어가면 받아내야 할 임금이 잔뜩 적혀 있는 파일이 쌓여 있었어요. 또 잘 해결도 안 되는 문제가 많아서, 늘 무거운 숙제를 안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밤에 전화가 울리면 누가 다쳤거나 아프거나 혹은 죽었다는 긴급한 일이 많았죠. 저도 가끔은 “출근하기 무섭다”라고 했을 정도로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어요. 이주민 상담을 하다 보면, 아기가 태어날 때도, 누군가 삶의 고난을 견딜 때나 행복한 순간에도, 누군가 죽어갈 때도 함께 하게 되죠. 이주민의 삶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켜보게 된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이유는 우리 사회에 이주민의 삶을 지원하는 행정체계가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이 민간지원단체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다 보니 이주민을 둘러싼 다수자인 한국인들의 마음을 어떻게 열어야 할까 고민하게 됐어요. 그래서 이주민과 공존을 주제로 한 교육 활동을 시작했죠. 우리 단체 사무실이 있던 부천 도당동에 이주민이 많이 살았는데, 거기서 이주민을 포함한 지역 주민들이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같이 음식을 해 먹고, 동네 축제를 하고, 수요일마다 공원에서 저녁밥을 같이 먹는 가든파티도 했어요. 이렇게 다 같이 모이는 행사를 열잖아요? 그럼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들도 섞이더라고요. 아이들이 나오면 엄마들도 따라 나오고, 동네 어르신들도 나와서 한 마디씩 참견도 해주고요. 저는 이주민만의 삶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지역 사회에서 주민들이 어떻게 함께 융화를 만들어 내느냐가 같이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봐요.

이주민과 지역주민의 교류 및 협력을 위한 프로그램 | ⓒ이란주

| 30년 넘게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 등 이주민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한국에 와서 살아내는 그 생명력과 그 힘을, 대단하다는 말 밖에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옆에서 그걸 보고 듣고 배우고 그 에너지를 전달받아 오히려 힘을 많이 얻었어요.

처음엔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 단신으로 왔지만, 여기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기도 해서,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곁에서 볼 수 있었어요. 제가 만난 아이들 대부분은 희망적이에요. 상당한 부침을 겪었지만 잘 견뎌내고 다들 열심히 잘 살고 있어요. 물론 한국 사회의 잣대로 봤을 때는 그 기준에 딱 맞지 않을 수 있지만요.  아이들은 저마다 힘이 있어요. 그 아이들의 생명력을 보면서 저도 힘을 얻고요. 우리 사회가 차별이나 편견, 배제라는 무거운 힘으로 아이들을 짓밟지 않기를 바라요. 아이들을 잘 키워내면 우리 사회는 분명 더 건강하고 튼튼한 사회가 될 거예요.

 

 

쌓여 있는 목소리를 대신 전합니다.

| 그렇게 활동가로 열정적으로 사셨는데요. 작가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시작은 별 게 아니었어요. 비영리단체의 운영은 후원금이 필요하잖아요. 후원금을 유치하려면 우리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잘 알려야 했어요. 그래서 상담 사례를 소식지에 쓰기 시작한 거죠. “우리 상담소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라고 알리는 보고서였어요. 소식지가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면서 『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잡지에서 정기적으로 써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주셨어요. 그렇게 잡지에 정기적으로 싣게 된 글들이 쌓였고, 쌓인 글을 엮어 『말해요 찬드라』라는 첫 책이 나왔어요. 두 번째 책 『아빠 제발 잡히지 마』도 같은 과정을 거쳐서 나온 거고요.

그런데 사례집은 사례가 하나하나 끊어져서 삶이 온전히 드러나기가 힘들더라고요. 특히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오롯이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르포르타주 소설 『로지나 노, 지나』를 쓰게 됐죠. 실제 한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 가정의 이야기를 엮어서 로지나 이야기로 정리했어요. 이주민에 대해 더 입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전하고 싶었거든요.

다양한 이주민의 이야기를 담은 이란주 작가의 저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글쓰기의 중요함을 깨닫게 됐어요. 우리 사회가 이주민에게 얼마나 가학적인 사회인지를 성찰할 기회가 필요했고, 글로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지금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제게는 크게 경계가 있는 일은 아니에요. 글쓰기는 제가 하는 일의 연장선에 있고, 여러 일 중 하나죠.

 

|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기록하는 일이잖아요. 윤리적인 고민도 많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처음엔 저도 잘 모르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어?”하는 자각이 오더라고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책에 담았는데, 그 아이가 책을 읽을 나이가 됐을 때였어요. 그때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글쓰기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지, 내 글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하게 됐어요.

가장 크게 고민하는 건, 이주민 당사자의 자긍심을 어떻게 드러낼 것 인가예요. 차별받는 이들의 단점이나 문제점을 비당사자가 고민 없이 언급하는 것은 오만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당사자는 그것을 드러내고 희화화할 수도 있죠. 한국계 미국인 이성진 감독의 드라마 <성난 사람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수치스럽고 궁색한 모습의 한국인 이민자가 주인공인데, 만약 같은 영화를 백인 감독이 만들었다면 인종차별이라 비판받았을지도 몰라요. 한국인 입장에서 시청하기 매우 불편했을 테고요.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하는 이야기이니 웃으며 볼 수 있죠. 당사자가 아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현실을 그리되 이주민의 자긍심을 담는 것입니다. 그다음 이야기는 당사자가 직접 하는 날이 오겠죠.

 

|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도 많이 쓰셨어요. 청소년을 위한 책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어른들의 생각을 바꾸는 건 너무나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사고가 유연하고 새로운 걸 잘 받아들이는 청소년, 아동에게 초점을 맞춘 글도 쓰고 있어요. 무엇보다 미래에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삶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일 때, 이런 다양한 이야기를 접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또 이주민 관련 현장을 경험하고 책을 쓴 사람으로도 책임감을 좀 느끼는 편이에요. 이주민은 한국어로 글을 쓰기 어렵죠. 하고 싶은 이야기가 화산처럼 폭발해도 한국어로 말하기 힘들죠. 그걸 제가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인의 해외 이주가 시작되고도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지금 2세, 3세들의 이야기가 글로 나오고 있어요. 이주민의 자녀들이 자라서 자기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있게 된다면, 저도 이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함께 자라는 아이들, 함께 고민하는 시간

| 이번에는 이주배경 아동과 청소년 관련 얘기를 해보려고 해요. 이주민 자녀를 위한 활동도 많이 하셨을 텐데요. 소개해주세요.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까지 쭉 이주배경 아동에 대한 활동을 했어요. 일단 아이들이 교육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미등록 아동들을 데리고 무작정 학교에 갔어요. “학생 좀 받아주세요” 하면서요. 초기에는 대부분 거절당했어요. 당연하죠. 미등록 학생을 입학시키는 제도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종종 마음이 따뜻한 교장선생님들이 받아주시기도 했어요. 그때는 학적을 만들 수 없을 때라 청강생으로 수업을 받았어요. 그냥 같이 수업 듣는 거예요. 어쨌든 수업을 들으면서 또래관계도 형성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할 수 있으니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죠. 학교 문을 정말 손톱으로 긁어서 연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2002년에 교육부가 정식으로 학적을 인정하면서 아이들이 정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죠.

2010년대엔 결혼 이민자 자녀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가족 안에서 갈등이 순식간에 터졌어요. 그래서 2011년에 청소년 동아리를 시작했어요. 사춘기에 진입한 친구들이 또래관계를 통해서라도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자존감을 키우기를 바란 거죠. 후원금 100만 원을 만들어서 강릉으로 여행을 갔던 게 시작이었어요. 1기를 그렇게 시작해서 2기, 3기까지 활동했어요. 지금은 그 친구들이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됐는데, 다들 나름 재미있게 잘 살고 있어요.

각종 활동을 통해 만든 강남시장마을축제와 청소년 뮤지컬 동아리 활동 | ⓒ아시아인권문화연대, 이란주

| 이주 배경 가정에서 부모-자녀 간 갈등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나요?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모어(모국어)가 다른 게 큰 문제예요. 부모는 자기 본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아이는 한국어가 모어죠. 그래서 깊은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가정에서 언어가 충돌해요. 이주 가정에서 일반적인 상황이고 갈등이에요. 제가 만난 아이들 대부분이 완전 깨발랄한 아이들인데 학교에 가면 그 아이가 맞는지 모를 정도로 위축되어 있어요. 집에서는 부모와 깊은 애착관계를 형성하기 힘들고,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도 매끄럽지 않아요.

거기에 종교적 갈등까지 더해지면 더욱 힘들어져요. 저는 명예살인을 고민하는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고, 집에 갇힌 딸을 만난 적이 있어요. 머리카락 잘린 딸을 보기도 했죠. 이주민의 관습, 문화, 규범이 한국사회와 충돌할 때,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가 큰 과제예요. 종교적 삶이 굳건한 분들이 한국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생기는 갈등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함께 고민할 필요도 있고요. 한국의 법과 규범을 넘어서는 행동을 고민하는 이에게, 끓어오르는 감정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판단하도록 한국 법에 대해 알려줍니다.

 

| 미등록 이주민 자녀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이고, 우리 사회의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요?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체류자격이에요. 체류자격은 당당한 삶의 토대죠. 민간이나 사회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거예요.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우리가 뭐 하겠어, 공장 가는 거지.” 물론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 이외에는 아무 기회도 없다는 점은 무척 슬프고 불공정한 것이죠. 이주배경청소년들이 다양한 직업훈련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고요, 되도록 다수자 그룹과 분리되지 않고 성장과정을 거치기를 바라고 있어요.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는 마음의 근육과 삶의 근육을 키워줬으면 좋겠어요. 한국 사람들, 다수자 그룹 속에서 성장하면서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면 어떨까요. 그래야 진짜 뿌리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요.

 

 

부평초가 뿌리내릴 때, 풍요로워지는 우리

| “이주민이 오면 한국은 더 풍요로워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요.

늘 느끼고 있죠. 이주민들이 여기서 일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일을 하면서 일상생활도 문화생활도 하죠. 일상을 제대로 영위해야 노동력이 재생산되고 경제도 풍요로워지죠. 문화도 마찬가지예요. 전국에 많은 네팔-인도 식당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유명한 인도-네팔 식당이 여럿이죠. 동대문 인근에 자리를 잡은 네팔 사람들이 처음 시작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어요. 지금은 한국 사람들도 즐겨 가는 유명한 식당이 많아요. 한국에 인도 음식 문화를 퍼트린 건 대부분 네팔 사람들이에요. 한국 사람들이 네팔로 여행 가고  트레킹을 많이 가는 것도 여기 살고 있는 네팔 사람들의 노력이 주효했다고 봐요.

왕십리 인근의 베트남 타운도 마찬가지죠. 이주민 밀집 지역에는 수많은 쌀국수 가게가 있어요. 처음에는 베트남 사람이 다른 베트남 사람을 위해 시작했어요. 하지만 이제 한국 사람들도 더 맛있고, 현지 맛이 더 많이 나는 베트남 음식점을 찾아가죠. 이주민들이 자기 문화를 한국 사회에 전달하고, 한국 문화를 자기 나라로 가져가면서 서로 풍요로워지는 거예요.

왕십리의 아시안마트와 베트남 음식점 | ⓒ서울정보소통광장

| 한국 사회가 이주민 인권을 위해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요?

저는 한동안 이주민의 인권 상황이 전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했어요.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오던 초기에 “때리지 마세요, 여권 돌려주세요.”라고 외쳐야 했던 상황을 돌이켜보면, 그래도 지금은 좀 나아졌지 않나 싶었던 거예요. 그동안 우리 사회는 “우린 같은 사람이야, 나에게 인권이 있다면 이주민한테도 인권이 있어.”라는 사실을 학습해 가면서 더 나은 제도를 만들어 왔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계절노동자 상황을 자세히 접하게 되면서 그런 생각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계절노동자제도는 농업과 어업 현장에 필요한 노동자를 연중 5~8개월만 고용하는 제도예요. 계절노동자들이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상황을 접하면서, 저는 많이 부끄러웠고 우리 사회가 갈 길이 아직 멀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이주민의 인권도 존중해야 된다는 이 간단한 논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함께 계속 다짐하고 깨닫고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어요.

 

|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현재 하고 계신 작업이 있으신가요?

일단 현재 제가 살고 있는 양구에서 벌어진 계절노동자 사건을 잘 마무리하고 싶고요. 또 하나는 미등록이었던 아동들이 등록 과정을 거쳐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는 과정을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담아내고 싶어요. 주로 미등록 상태로 성장해서 최근 등록하고 삶의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데, 그 과정과 마음을 담아 기록해 보고 싶어요. 저는 이주민을 생각하면 늘 물 위에 떠 있는 개구리밥이 같이 떠올라요. 이주민 청년들이 더 이상 떠돌지 말고 바닥에 닿아 뿌리내리고 생활인으로 시민으로 살아내기를 바라면서, 그 과정을 같이 담아보고 싶습니다.

 

인터뷰·글 | 윤성원

이주민과 함께하며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이란주 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우리 사회의 부평초가 바닥에 깊이 뿌리 내리기를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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