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살린 조선의 교육 인플루언서, 이황의 MBTI는 무엇일까?
작성자 초희
MBTI로 보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
지방대 살린 조선의 교육 인플루언서, 이황의 MBTI는 무엇일까?

5월 15일 지난주 목요일, 스승의 날이었죠. 회색빛 빌딩숲이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린 6년차 직장인이지만 어제는 늘상 새로운 배움으로 가득했던 푸릇푸릇했던 옛 시절이 문득 그리워져, 추억 속 선생님들께 부러 연락을 드려봤어요.
뉴니커 분들도 그 때 그 시절, 감사했던 선생님들을 회상해 보는 소중한 하루 보내셨나요?
저는 시계의 태엽을 감아 더 먼 시절까지도 한 번 상상해 봤습니다. 오로지 '학문'만이 출세의 등용문이 되었던 조선 시대, 그 시대를 살던 이들에게는 '스승'이라는 존재가 더욱 유다르게 다가왔을 것만 같아요.
만약 그 시절에도 스승의 날이 있었더라면 그 날 조선 사람들의 뇌리를 스쳤을 탑티어 스승은 누구였을까요?
공자? 맹자? 주자? 아뇨.
이분들, 당연히 훌륭한 분들이지만 결국 '중국인'이잖아요. 메이드 인 조선에 한해서요.
그래서 오늘의 주제로 삼아 봤습니다. 모두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조선의 넘버원 스승, 오늘날 천원 권의 모델이기도 한 바로 '퇴계 이황'입니다.

지피티가 그려 준 네컷 만화
책을 보며 하늘을 품은 소년(I)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경상도 안동에서 '막냉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을 품에 안은 지 7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결국 어머니 박씨는 홀로 농사일을 지으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이황은 어머니와 형들의 따뜻한 사랑 속에서 그늘 없이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과부의 자식들을 자주 손가락질한다. 너희들이 남들보다 백 배 더 노력해 공부하지 않으면, 어찌 이러한 비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자식들의 교육에 깊은 열의를 보였습니다. 조선판 '극성맘'이었죠. 이황은 이런 어머니의 관심을 잔소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천성을 타고 났습니다. 공부를 너무도 사랑했거든요.
작은 집에 있는 만 권 책을 사랑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십 년 넘게 학문에 힘썼네.
요즘에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듯하여
내 마음 전체를 끝없는 하늘처럼 여기게 되었네.
- 퇴계집
이황이 10대 무렵에 쓴 책을 향한 러브레터입니다. 어린 시절 이황은 늘 책 속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집에만 콕 틀어박혀 밤낮을 잊고 책에만 매달리니 건강을 해칠 수밖에요.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이황은 20대 한창 창창할 나이가 되어서는 오히려 한동안 병을 끙끙 앓기도 했습니다.
오랑캐도 사람입니다(N)
타고난 공부벌레로 28살에 과거 1차 시험을 너끈히 합격하며 어머니 박씨의 기대를 한껏 고조시킨 이황, 갑자기 복장 터지는 소릴합니다. 관리가 되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고 싶다는 것이었죠. 어려운 살림에 다 키워 놨는데, 어머지 입장에선 속이 타들어 갈 수밖에요.
어머니의 성화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험 준비에만 매달리게 된 이황, 잠깐 동안의 방황이 무색하게 34살 1등으로 최종 시험에 합격하며 당당히 조정에 입성합니다.
이때부터 이황의 앞길은 탄탄대로였습니다. 중종, 인종, 명종 무려 3명의 왕을 모시는 동안 굵직한 관직은 모두 도맡았죠.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에서 이력을 시작한 그는 그 뒤로도 국왕의 자문을 돕는 홍문관, 역사서 편찬을 담당하는 춘추관,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등 유망한 조직을 두루 거치며 범상치 않은 존재감을 나타냈습니다.
오로지 '책책책'밖에 모르던 '극내향인' 이황, 겉으로 보면 한없이 부드러운 이미지였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끝까지 밀어 붙일 줄 아는 카리스마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면모는 그가 43세의 완숙한 나이에 이르렀을 때 중종에게 올린 상소의 내용으로도 알 수 있죠.
사람들은 보통 "오랑캐는 짐승이다."라고 합니다만, 오랑캐도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다만, 그들이 예의를 알지 못해 짐승과 비슷해 보일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북쪽 오랑캐(여진)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이럴 때 남쪽 오랑캐(일본)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위아래 양쪽으로 변란이 일어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 이황, 퇴계집
당시 조정에서는 일본과 외교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1510년(중종 5)과 1544년(중종 39)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여 교역을 늘려달라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죠.
'오랑캐도 사람이다',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선 사회에서 절대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찰나의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며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힘껏 주장했습니다. 일본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소통까지 단절해 버린다면 오히려 나중에 더 큰 화를 불러올 수 있으니까요. 이황이 세상을 떠난지 20여 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새삼 그의 통찰이 얼마나 앞서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정으로부터 '이직 제안'이 도착했습니다
원체 '관직'에 욕심이 없었던 이황, 그가 벼슬길에서 완전히 떠나게 된 건 어머니의 죽음이 계기였습니다. 오로지 아들들의 앞날이 전부였던 어머니의 죽음은 이황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 얼마나 맘고생을 했는지, '몸이 꼬챙이처럼 말라 병을 얻었다'는 기록마저 전해지죠.
장례가 끝난 뒤, 이황은 여생 동안 학문에 힘쓰기로 작정합니다. 고향 근처의 토계 지역에 작은 암자를 짓고는 자신의 호를 '퇴계'라고 지었죠. '토끼가 뛰어노는 골짜기(토계)로 물러났다(퇴)'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잊을만 하면 조정에서 관직 오퍼가 들어왔죠. 왕의 뜻을 한사코 물리칠 수 없었던 이황은 결국 몇 차례 더 한양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매번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냈습니다. 1545년부터 1560년까지 이황이 낸 사직서는 스무 장도 넘었습니다.
프로 '악플러'마저도 끌어안은 F력
이황이 그렇게까지 출세길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에겐 생각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다른 꿈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들을 키우는 '교육자'로서의 길이었죠.
나라에서 세운 교육 기관은 잘 관리되고 있지만, 지방의 기관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선비들은 그곳에서 공부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입니다. - 퇴계집
평소 이황은 지방의 교육이 점점 쇠퇴해 가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1560년 어느덧 59세 중년의 나이에 이른 이황, 이윽고 고향 근처에 도산 서원을 짓습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 앞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굵직한 벼슬을 두루 거친 이황이 교편을 잡았다는 소식에 선비들은 너도나도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선비들에게 이황은 한없이 따뜻한 스승이었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든 제자에게 존대했고, 매일같이 기나긴 강연을 이어가면서 차분한 태도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자 노력했죠.
제자 중에는 양반이 아닌 평민 신분의 대장장이도 있었습니다. 바쁜 일과 중에도 틈틈이 짬을 내어 글을 배우러 오는 그를, 이황은 특히나 아꼈습니다. 마음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활짝 열어 주려 했던 겁니다.
이황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에게도 한없이 유연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보다 무려 26살이나 어렸던 젊은 관리 기대승과 주고받은 100통의 편지에서 잘 드러나죠. 어느 날, 기대승은 대뜸 이황의 학설에 정면 반박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갑작스런 지적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하지만, 이황은 차분하게 논리를 세워가며 장장 8년 동안이나 토론을 이어 갔죠.
이황은 기대승의 주장 덕분에 자신의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며 감사한 마음을 표했습니다. 원로 학자의 차분하고 겸손한 태도에 기대승의 마음도 한없이 누그러졌습니다. 얼마나 감동했던지 프로 악플러에서 빅팬이 된 기대승,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엔 직접 묘지명을 지으며 그에 대한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비주얼씽킹' 교육서 성학십도를 쓰다(J)
이황은 제자들의 교육만큼이나 학문 연구에도 부지런히 마음을 쏟았습니다. 성리학의 역사를 정리한 '송계원명리학통록', 마음을 수양하는 법을 담은 '심경' 등. 그가 저술한 여러 책 중에서도 넘버 원 베스트셀러가 된 건 소년 왕 선조에게 바친 '성학십도'였습니다.
임금의 마음은 온갖 일이 시작되는 곳이며, 모든 책임이 모이는 곳입니다. -퇴계집
이황이 도산 서당에 말뚝을 박은 이후로도 조정에서는 그를 찾는 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비록 벼슬은 거절했지만, 이황은 갓 왕위에 오른 소년 왕 선조에게 온마음을 담아 책을 썼죠. '성학십도'는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어려운 핵심 개념을 10개의 그림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조선판 '비주얼씽킹' 교육서라 할 수 있었죠.
그 뒤로도 도산 서당에서 교육에 온힘을 쏟던 이황이 눈을 감은 건 70세의 나이에 이르러서였습니다.
평소에 아는 대로 많은 걸 가르쳤다지만, 나도 모르게 틀린 것이 있었을지 모르니 양해해 달라 - 퇴계집
이황이 제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조선 성리학에 큰 획을 그을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쌓으며 탑티어 학자의 반열에 들었지만, 끝까지 겸손함을 잃지 않았던 거죠.
이황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인 선비는 3백 여 명에 달했습니다. 선조 역시 큰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며 '문순'이라는 시호를 지어 주었죠. 문순이란 '도와 덕이 있고 늘 균형 있는 태도로 올바르고 순수하게 학문을 대했다'는 뜻입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 이황은 조선의 최고 대학 성균관 안에 있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문묘에 이름을 올리는 명예를 안았습니다. 그렇게 이황은 조선의 No.1 스승으로, 조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기에 이릅니다.
안녕하세요 뉴니커 여러분!
MBTI로 보는 조선 인물 이야기, 10편 이상을 발행하고도
늘 쓸 때마다 참 어렵네요.
그럼에도 제 글을 꾸준히 읽어 주시고, 댓글 남겨 주신 분들이 계셔서
큰 힘 내서 꼬박꼬박 쓰고 있습니다!
좋은 피드백해 주시는 분들, 늘 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