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판 G2 시대를 이끈 왕, 광해군의 MBTI는 무엇일까?

조선판 G2 시대를 이끈 왕, 광해군의 MBTI는 무엇일까?

작성자 초희

MBTI로 보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

조선판 G2 시대를 이끈 왕, 광해군의 MBTI는 무엇일까?

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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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oin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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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뉴스를 켜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있죠. 바로 트럼프. "아메리카 그레잇 어게인!"을 외치며 관세 폭탄을 때려대는 그의 행보에 온세상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폭주하는 트럼프를 지켜보며 조용히 칼을 갈고 있는 이도 있습니다. 바로 시진핑. 트럼프의 거센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침착하게 맞불을 놓습니다.

미국과 중국, 거대한 고래들의 전장터에서 전세계 새우들은 눈치게임 중입니다. 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어떤 수를 두어야 할까, 하루하루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형국 속에 저마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죠.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 오늘날과 비슷한 고래 싸움이 있었습니다. 때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드넓은 중국 대륙을 제패한 뒤 오래도록 전성기를 누려온 원조 고래 명나라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민 신입 고래가 등장했습니다. 먹을 것도 별로 없었던 후미진 산골에서 타고난 전사 DNA를 바탕으로 쑥쑥 성장하며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후금(청)이었죠. 이 두 고래는 날마다 엎치고 덮치는 치열한 각축전을 이어 갔습니다.

그 둘을 지켜보며 불안에 몸을 떨던 대표 새우, 누구였을까요?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로 두 고래와 직접 살을 맞대고 있었던 나라, 바로 조선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혼란의 시대, 조선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조선판 G2 시대를 이끌었던 왕 광해군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GPT가 그려 준 이번 편 요약 네 컷 만화

"힘없는 논리만으로는 칼날을 막을 수 없다." 신하들을 향해 광해군이 날카롭게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신하들도 물러설 생각이 없습니다. "스승이자, 아버지인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라며 강하게 맞섰지요.

사연은 이렇습니다. 후금의 맹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던 명나라가 조선에게 군사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한 거죠.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왔으니, 이제 조선 너희 차례다"라는 게 그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그리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전쟁에 휘말린다면 정말 말 그대로 '망국'의 길이 열릴 수도 있었죠. 심지어 후방에 있는
쌩쌩한 일본의 존재도 위협적입니다. 기회를 엿보던 일본이 또 다시 '왜란'을 일으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세자 시절, 맨몸으로 전장을 누벼 본 경험이 있는 광해군은 누구보다 약소국의 뼈 아픈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때 보다 실리를 따져야 하는데 속 빈 강정과 같은 논리 만을 외치는 신하들이 노엽고, 야속하기만 했죠.

신하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조선은 엄연히 중국에서 건너온 '성리학'이라는 통치 철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이니까요. 명나라는 성리학의 논리에 따르면 '중화', 쉽게 말해 성인의 경지의 오른 세계 유일의 나라였습니다. 그 중화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조선의 국격은 땅으로 떨어질테고 그렇게 되면 저 야만의 나라인 일본, 후금과 다를 바가 없어집니다. 즉 조선이란 나라의 정체성, 뿌리 자체가 흔들리게 되는 거죠.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광해군이 취한 다음 액션은 무엇일까요? 결론을 살펴보기 전에 시계의 태엽을 감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하루아침에 세자가 된 왕자(I)

광해군, 그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습니다.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첫째도 아니고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왕좌는 먼 이야기였죠.

선조도 후궁의 아들을 차기 왕으로 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선조 자신도 적장자가 아닌 후궁의 아들로 왕위를 물려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자 출신이 왕이 되었을 때 정치적으로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선조는 재위 내내 몸소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592년 4월, 광해군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무수한 일본군이 부산을 지나 한양으로 매섭게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 때문이었죠. 기나긴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라의 명운이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워지자 선조는 더 이상 후계 결정을 미룰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의 아들 중 가장 총명하기로 이름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죠.

하루아침에 세자가 된 광해군은 책봉 의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다음날 새벽 부왕을 따라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거리마다 칼과 창이 삼엄하고 고함소리가 땅을 진동하는데, 모두 왕이 탄 가마가 성을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 선조실록

수도 한양을 버리고, 또다시 평양성을 버린 임금 선조를 향한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선조의 가마를 막아 선 백성들은 분노에 찬 원성을 쏟아내며 궁인들과 신하들에게 폭력을 행사했죠. 이처럼 조정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졌습니다. 부왕의 곁에서 민심의 이반을 고스란히 지켜본 광해군, 그는 바람 잘 날 없을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을까요?

높아지는 아들의 위상과 추락하는 아버지의 권위(S)

성난 백성들의 소동을 피해 가까스로 의주로 몸을 피한 선조, 또다시 충격적인 선포를 합니다. 국경을 넘어 명나라로 피신가겠다는 것이었죠. 조정을 둘로 나누어 광해군에게 반쪽 조정을 맡기고 자신은 명나라에서 훗날을 도모하겠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신하들의 강한 반발로 결국 명나라 망명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조정을 나눈다는 '분조' 계획은 그대로 실행됐습니다. 광해군은 남쪽으로 내려가 조정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일본군에 맞설 병사를 모은다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죠.

산길이 매우 험하여 열 걸음을 걸으면 아홉 번을 넘어져 일행 모두가 매우 고생하였다. - 정탁, 피난행록

분조 활동은 그야말로 고생길이었습니다. 험한 산길을 누비며 노숙도 마다하지 않아야 했죠. 평생을 왕족으로 살아오며 안락한 생활 만을 누려온 광해군에게 이러한 환경은 가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한마디의 불평도 없이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전장을 누비며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에게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 주었습니다.

세자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경기도의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서로 앞 다투어 적과 싸우기 시작하여 적의 사기가 조금씩 꺾이고 있습니다. - 정탁, 피난행록

시간이 갈수록 세자 광해군의 위상은 드높아졌습니다. 반대로 선조의 권위는 곤두박질쳤죠. 유생들은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당돌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고, "임금이 제 잘못을 뉘우치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인물까지도 등장했습니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수마저도 선조를 꾸짖는 한편 광해군은 "영웅의 풍채를 갖추고 있다."는 선 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죠.

이처럼 선조와 광해군 사이에는 점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F)

그렇게 7년, 마침내 기나긴 전쟁은 끝났지만 광해군의 지위는 위태롭기만 했습니다. 전장을 누비며 큰 공을 세운 광해군을, 선조는 마치 철천지원수 보듯 했으니까요.

심지어 늦장가를 든 선조가 뒤늦게 보게 된 막둥이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을 더욱 불안하게 했죠. 날이 갈수록 선조는 광해군을 더욱 홀대했습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세자가 바닥에 엎드려 피를 토했다."는 기록마저 전해지고 있죠.

그런데 하늘이 광해군을 도왔습니다. 선조가 예상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무사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된 거죠. 우여곡절 끝에 왕좌에 앉은 광해군은 슬픈 과거를 뒤로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온힘을 쏟고자 했습니다.

세법을 개정하여 재정을 확보하고, 당대 일류 의학자 허준을 시켜 백성을 위한 의약서를 펴내고, 조선 팔도의 주요 성곽을 재정비하는 등, 몸이 두 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매일같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던 광해군에게 야속하게도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옵니다. 영창대군의 존재가 결국 뒤탈을 불러 오고야 만 것이죠.

왕이 된 지 5년이 된 해였습니다. 부산에서 반란을 꾀하다 잡힌 이들의 입에서 영창대군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적장자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릴 계획이었단 것이죠. 결국 광해군을 칼을 꺼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어머니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가두고 여덟 살 난 영창대군은 저 멀리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립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영창대군은 유배지에서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린 동생을 죽인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힌 광해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이번에는 ‘부모의 나라,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린 왕’이라는 낙인이었죠.

명나라와 후금, 두 고래가 세계 패권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전쟁에 광해군은 절대로 휘말리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합니다. 못이기는 척 명나라에 구원군을 보내긴 했지만, 정세를 날카롭게 주시하며 실리를 챙기는 줄타기 외교를 펼쳤죠.

15년 만에 왕좌에서 쫓겨난 혼군(P)

1623년, 결국 광해군은 15년 만에 왕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즉위한 조카 인조가 내세운 명분은 어머니를 감금하고 형제를 죽였다는 '폐모살제'였습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효'를 다하지 않은 패륜은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그러고는 새 조정의 외교 방침을 명과 친하게 지내고 후금을 배척한다는 '친명배금'으로 정했습니다.

그 뒤로 광해군은 조선 시대 내내 세상을 어지럽힌 왕이라는 '혼군'으로 불렸습니다. 애석하게도 광해군의 본래 이름은 '이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혼은 옥을 뜻하는 아름다운 글자였죠. 그러나 세상은 왕위에서 쫓겨난 그를 '옥'이 아닌 어두움과 어리석음을 뜻하는 '혼'으로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압니다. 호기롭게 왕좌에 앉은 인조는 1627년과 1636년, 무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어야 했죠. 1636년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는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던 청나라 황제 앞에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고개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항복 의식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당한 피해에 비하면 인조가 당한 굴욕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수만 명의 백성들은 참혹한 노예 생활을 해야 했죠. 고단한 생활을 차마 견디지 못해 도망을 감행했다가 잡혀 온 이들은 발 뒤꿈치가 잘리는 잔인한 형벌을 받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은 이 모든 역사를 유배지에서 고스란히 지켜봐야했습니다. 그가 머나먼 유배지 제주에서 눈을 감은 건 1641년, 왕좌에서 쫓겨난 지 18년 만이었죠.

처참한 생을 살아온 그가 마지막 눈 감는 날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기던 중 남겼다는 구슬픈 시구만이 그의 심정을 짐작하게 할 뿐이죠.

아버지 선조와의 갈등 속에서 숨죽이며 자신의 안위를 지켜온 광해군(I), 끝내 왕위에 올라 실리적인 통치를 펼쳐 나가려던 광해군(S), 전쟁의 폐허 속에서 백성을 위한 새 나라를 세우려 한 광해군(F), 그러나 자신의 비극적인 최후만큼은 미처 예견하지 못한 광해군(P). 그의 MBTI는 ISFP가 아닐까 합니다.


광해군의 삶, 어떻게 보셨나요?

오늘날의 세계 정세를 방불케 할 정도로 미친 싱크로율이라 많이 놀라셨나요?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먼 옛날의 역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언정, 과거의 상황을 그대로 현재에 대입해서 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죠.

다만 옛날과 비교했을 때 분명하게 달라진 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옛날에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들이 왕과 신하로 정해져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온국민이 나라의 앞길에 관여할 수 있는 당당한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어렵기만 한 요즘이지만 우리 모두 눈을 부릅뜬 채 우리의 앞날을 주체적으로 생각하며 결정하려 한다면, 결단코 먼 옛날 비극적인 역사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리라 저는 믿습니다.

난세를 살아가는 모든 뉴니커 분들, 화이팅입니다!


PS. 뉴니커 여러분, 얼마 전 제가 뉴닉에서 연재하는 글과 똑같은 주제로 유튜브를 개설했습니다. 인물들의 이야기를 숏츠로 정리해 보고 있어요! 아직 많이 조촐하지만 많이 놀러와 주세요!

www.youtube.com/@초희_cho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