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진정한 워커홀릭, 정조의 MBTI는 무엇일까?
작성자 초희
MBTI로 보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
조선의 진정한 워커홀릭, 정조의 MBTI는 무엇일까?

예정에 없던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갈 리더는 어때야 할까, 고민이 많아지는 요즘이죠.
그런 의미에서 먼 역사 속 리더를 톺아 보기로 했습니다. 숱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정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776년 3월, 조선의 21대 왕 영조가 83세의 긴 일생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세손의 신분으로 무려 22년간이나 그 곁을 지키던 손자 정조가 왕위를 물려받았죠.
즉위식이 열리던 날, 정조는 유독 많이 울었습니다. 젊은 왕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신하들의 긴 행렬 앞에 그는 차마 왕좌에 앉지 못하고 서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해가 기울 무렵이 되어서야 왕좌에 오른 정조가 뱉은 첫마디였습니다. 날 선 그의 외침에 신하들은 두려움으로 몸을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벤지 매치 ‘탕평’의 시작(E)
시간의 태엽을 감아 1762년 윤5월의 한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피와 눈물이 뒤엉키며 혼란스러웠던 그 날, 세자가 왕의 명으로 뒤주에 갇혔습니다. 세손은 아비를 살려달라며 빌었지만, 돌아오는 건 할아버지의 차가운 냉대 뿐.
그렇게 비극적인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고 지나온 까마득한 세월,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살얼음판 같은 나날들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담했던 신하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정조의 허물을 찾으려 애썼죠.
서러운 세월들은 이제 안녕, 왕이 된 그를 막아 설 수 있는 건 이제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을 해치려 했던 이들에게 채찍을 꺼내 드는 대신 당근을 던져주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복수가 아닌,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는 데 있었으니까요.
“나는 오직 인물됨 만을 보아 어진 자를 등용하고, 모자란 자는 내칠 것이다.”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 정책을 이어받아 자신의 통치 철학을 공포했지요. 탕평은 ‘넓고 평탄하여 치우침이 없다’는 뜻으로, 유학 경전 중의 하나인 시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눈물 섞인 과거를 뒤로한 채 꿈을 쫓기로 한 정조,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카리스마로 신하들을 휘어잡기 시작합니다.
헤드헌팅의 귀재(S)
“천하를 다스리는 스승이 되고 싶습니다.”
세손 시절, 꿈이 뭐냐는 영조의 물음에 정조가 답한 말입니다. 정조는 과거 시험이라는 국가 고시를 패스한 똑똑한 신하들마저 꺾고 들어올 수밖에 없는 스승 중의 스승, ‘군사’가 되고자 했던 것이죠.
남다른 목표를 세운 그에게 남은 건 뼈를 깎는 노력 뿐이었습니다. 식사는 세 끼가 아닌 두 끼만 먹고 밤낮없이 독서에 몰두하면서 활쏘기 등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정조가 그 꿈을 실현하기 세운 것은 ‘규장각’이라는 이름의 브레인센터였습니다. 그러고는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젋고 유능한 유생, 관리들을 헤드헌팅해서 직접 가르치는 건 물론, 날마다 조선을 위한 정책을 연구하도록 마이크로매니징에 들어갔죠. 그렇게 갈갈, 정조의 열정 속에 녹아든 이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조선의 정치, 경제, 역사, 법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맹활약합니다. 수 백 권의 책을 써내며 조선의 탑티어라고 불렸던 정약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물렁하지는 않지(T)
하지만 모든 신하가 정조의 카리스마 앞에 고개 숙인 건 아니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침소 코앞까지 침입하는 사건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주죠.
그 뒤로도 정조의 자리를 노리는 역모 사건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1786년 정조의 사촌 동생이었던 상계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했던 구선복의 역모가 대표적입니다. 의금부로 끌려 온 구선복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을 계획했다”며 털어 놓습니다.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성했던 신하 중 한 명이었죠.
이번 만큼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했던 사건들을 친히 조사하며 직접 죄인들의 죄를 엄중하게 물었죠.
한 발 더 나아가 무예의 고수들만 엄선한 새로운 군대 ‘장용영’도 창설합니다. 장용영은 남다른 아우라를 뿜어 내는 정조만의 친위 부대로 단단히 자리잡아 갑니다.
유토피아를 향해(J)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오랜 숙원이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 회복 사업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 사업의 상징과도 같았던 수원 화성으로 떠나기 전 정조가 내뱉은 우렁찬 포부였습니다. 당시 정조는 세자가 장성하면 왕의 자리를 물려 주고 자신은 화성으로 이사해서 조선을 위한 정책 연구를 이어 가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죠.
하지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정조는 끝내 자신의 꿈을 모두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습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눈을 감은 건 1800년, 19세기의 서막이 이제 막 열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번외) 원 오브 TJ
조선판 르네상스를 이끈 왕, 정조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건 그를 따르던 당시의 신하들과 백성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비극을 딛고 일어서서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며 눈부신 서사를 써 낸 그의 인기는 오늘날에도 식지 않고 있죠.
그의 죽음을 지나치게 안타까워 한 몇몇 이들은 ‘정조가 독살을 당했다!’는 썰을 외치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적이 많았던 정조, 정말 그는 제 명에 죽은 게 아니었을까요?
증거가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2009년에 발굴된 종이 뭉치들이 이러한 의혹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는 단서를 주고 있죠.
종이 뭉치의 정체는 정조가 심환지라는 신하와 주고받은, 무려 290여 통의 편지였습니다. 심환지는 사사건건 정조의 정책에 태클을 걸던 눈엣가시같은 정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그런 심환지와 남몰래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치판을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주물러 왔던 것이죠.
편지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더 기가 막힙니다. 현대인에게 익숙한 이서진, 이준호 등이 연기한 정숙하고도 잘생긴 정조의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질 정도죠.
편지 속에서 정조는 날 것 그대로의 욕설을 즐겨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왕의 체통에 걸맞지 않게 속된 한글 표현을 쓰거나 자신의 감정을 필터 없이 쓰고 있거든요. 한자 ‘기쁠 희’를 연달아 쓴 자태는 오늘날의 ‘ㅋㅋ’을 연상케합니다.
자, 이러한 의외의 면모는 뒤로 하고 왜 이 편지들이 정조의 ‘자연사’의 단서가 되는 걸까요? 정조는 편지에서 틈이 날 때마다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는 바빠서 눈코 뜰 새 없으니 괴롭고 피로한 일이라.
나는 일을 보느라 바빠서 잠깐 틈을 내기도 어렵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가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나서야 밥을 먹으니, 피로하고 날이 갈수록 소모되는 기분이다.
백성이 마음에 걸리고 조정이 염려되어 밤마다 침상을 맴도느라 날마다 늙고 지쳐간다.
탑 오브 탑 워커홀릭이었던 정조는 죽기 직전 코앞에 있는 사물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과중한 업무 탓에 눈 건강까지 해친 것이죠. 끊임없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쌓이고 쌓였던 피로가 마침내 병이 되어 그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가 버린 것입니다.

고단한 생의 끝자락에서 정조가 가장 아쉬워했던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에디터의 코멘트✍️
저는 역사 속 위인을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만 단정하는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종종 생각해 왔어요. 먼 옛날이라고 해서 사회가 단순했던 게 아니잖아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생각이 너무도 다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아우르며 자신의 철학과 신념대로 실무를 잘 해 나가야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직업이죠.
그런데 여태까지 우리는 정조라는 '정치인'을 그저 타의 모범이 될 '도덕적인 임금'이었다고 쉽게 치부해 왔던 게 아니었을까요? 역사 속 정조는 누구보다 정치력이 뛰어난, 어떤 경우에는 아비를 죽인 자들과도 손을 덥석 잡기도 했던, 정말 기민하고 무서울 정도로 일잘러였던 프로 정치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밖에 몰랐던 진정한 워커홀릭이었죠.
정조의 오른 팔이었던 정약용도 그런 정조를 회고할 때면 늘 혀를 내둘렀습니다. 정약용 자신도 책을 500여 권이나 쓸 정도로 꽤나 독종(?)이었는데도 말이죠. 정약용이 규장각에 있을 때 정조는 그를 정말 말 그대로 들들 볶았습니다. 정약용은 정조가 내 준 산더미같은 숙제를 쳐 내야 했기 때문에 늘상 풀로 야근을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정조가 그렇게 치열하게 밤낮없이 일을 해 나간 이유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궁극의 목표이자 종착점에는 늘 백성이 있었죠. 정말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꿈 꿨다는 게 그의 치적을 톺아 보면 여실히 느껴집니다.
저는 최근 발굴된 편지들의 의의가 바로 이러한 정조의 면모를 잘 보여 주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
이 글이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 리더는 어떠면 좋을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조그마한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
추신
오랜만에 MBTI 시리즈로 인사드립니다 🙇♀️
책 원고를 완성하느라 그동안 아티클 연재에 소홀했어요.
이제 주에 한 번씩 꾸준히 써 보려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