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살다 간 천재 미남 화가, 김홍도의 MBTI는 무엇일까?

바람처럼 살다 간 천재 미남 화가, 김홍도의 MBTI는 무엇일까?

작성자 초희

MBTI로 보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

바람처럼 살다 간 천재 미남 화가, 김홍도의 MBTI는 무엇일까?

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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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oin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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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을 동경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긴 말이 필요없이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는 그들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하늘이 내린 사람은 따로 있구나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직업이라지만, 막상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려고 하면 참 쉽지 않습니다. 자본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사회에서 먹고사니즘의 문제를 가볍게 무시하고, 의연히 제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요. 예술가의 주머니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좋지 못했습니다.

김홍도,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더라도 그의 이름 석자는 참 친숙합니다. 붓 하나로 조선 팔도를 뒤흔들었던 천재 화가 김홍도, 그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요?

✒️조선의 미남 에세이스트(E)

조선 시대 남녀노소의 각기 다른 일상을 담고 있는 김홍도의 풍속화는 오늘날 단원 풍속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뭐 하나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그림이 개성이 넘치고 재미있지만, 널리 알려진 그림 하나만 살펴보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김홍도의 자리짜기(출처:국립중앙박물관)

부부는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고, 그 옆에는 기껏해야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아이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맞추어 어머니는 실을 뽑고, 아버지는 그 실로 돗자리를 짜고 있지요. 돗자리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공예품입니다. 아무래도 부부는 돗자리를 시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가던 수공업자인듯 합니다. 그런데 부부는 아들에게 돗자리를 짜는 기술을 알려 주기보다는 글을 읽히고 있습니다. 아들이 장차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집안을 크게 일으켜 줄 것이라는 간절한 희망을 품고 있었나 봅니다.

생동감 넘치는 필치로 그린 일상의 한 장면은 이렇듯 화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김홍도는 조선의 에세이스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김홍도는 그림만 잘 그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첫 만남에서 단번에 호감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생김새가 맑고 훤칠하게 키가 커서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아름다운 풍채에 마음까지 넓어 사람들이 그를 신선과도 같다고 한다.”라는 등의 증언으로 알 수 있지요. 나아가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거문고를 한 두곡 연주하며 즐기거나, 즉석에서 한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소양도 남달랐다.“는 일화마저 있습니다. 잘생긴 외모에 다재다능함까지, 그는 그야말로 존재만으로도 감사한 조선의 넘버원 예술가였습니다.

🌟다재다능한 셀럽으로 성장하다(N)

1745년(영조 21)에 태어난 김홍도는 열여덟에서 열아홉 정도에 그림을 전담하는 조선의 관청인 도화서의 화원이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김홍도의 집안은 화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의 조상 중에는 무과에 합격하여 무인으로 이름을 남긴 이들이 적지 않았지요. 그런 그가 도화서에서 발을 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스승 강세황의 강력한 추천 덕분이었습니다.

강세황은 조선의 다채로운 자연 풍광을 화폭에 근사하게 담아 내며 명성을 쌓아올린 문인 화가이자 뛰어난 평론가였습니다. 마흔 살 무렵에 벼슬 생활을 잠시 접고 경기도 안산에 내려와 쉬고 있던 그가 어떠한 계기로 김홍도에게 그림을 가르쳤는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어느덧 수년의 시간이 흘러 김홍도가 스승이 자신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무렵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김홍도는 스승에게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써 주기를 부탁했지요.

강세황은 정성스레 제자의 포폴을 써 줍니다. 포폴의 내용은 조금 의아합니다. 김홍도라면 단연 풍속화 이야기가 서두에 나올줄 알았는데 도교화라니요.

김홍도의 파상군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먼 옛날 중국에서 전해진 도교는 몸과 마음의 수련을 통해 불로장생을 이루어 신선이 되기를 바라는 종교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에서 신선이 노니는 모습을 그린 신선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김홍도의 투견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의 평가대로, 김홍도의 신선도는 당대 으뜸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이밖에도 궁중 기록화, 산수화, 동물도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주었지요.

🤦‍♂️김홍도=풍속화 브랜딩의 속사정

오늘날 우리에게 ‘김홍도=풍속화’라는 등식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등식에는 많은 사람의 희망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 시대 풍속화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일제강점기 때부터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겨 설움이 가득하던 시대에 연구자들은 조선만의 개성 있는 일상을 담고 있는 김홍도의 풍속화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북한 학자들은 풍속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지체 높은 양반이 아닌, 평범한 백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신분제로 억압받던 시대에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을 화폭 속에 담은 김홍도를, 그들은 ‘혁명가’라고 평가했지요.

김홍도가 풍속화의 대가로 새롭게 조명받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 또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사회의 여러 혼란을 바로잡고 개혁 정치를 펼친 왕으로 알려진 정조가 일찍이 김홍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특별히 총애했다는 것입니다.

😘임금님도 반한 그림 실력

어느 날 정조는 김홍도에게 특별한 명을 내립니다. 백성의 삶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풍속화를 그려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김홍도는 정조의 꿈을 가슴에 품고 백성의 다채로운 일상을 화폭에 담았고, 정조는 그의 풍속화를 발판 삼아 백성을 위한 여러 정책을 기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희박합니다. 정조가 김홍도를 비롯한 여러 도화서 화원에게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그림을 그려오라는 사실만이 확인될 뿐이지요. 아마도 김홍도=풍속화의 신화가 부풀려지면서 만들어진 극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김홍도의 궁중기록화, 평안감사향연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럼에도 정조의 김홍도에 대한 사랑만큼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김홍도는 영조가 왕위에 있을 때부터 당시 화원으로서는 최고의 명예라고 할 수 있는 왕의 초상, ‘어진’을 그리는 화가로 두 번이나 뽑혔습니다. 한 번은 영조의 어진을 그렸고, 다른 한 번은 정조의 어진을 두 차례에 걸쳐 그렸지요.

그 때부터 김홍도를 유심히 지켜본 정조는 ”김홍도는 그저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림에 정신을 담는다.“고 극찬했습니다. 실제로 ”김홍도는 항상 왕이 불시에 부를 것을 기다렸으니 집보다 궁에 있을 적이 많았다.“고 할 정도로 정조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요.

💸텅장 속 잔고, 무심한 ’아버지‘ 김홍도(T)

이처럼 김홍도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 화가이지만, 살아생전에도 그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김홍도는 그림 그리는 고질병이 있어 작품을 구하는 이가 나타나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니, 온 나라가 그의 그림으로 가득하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김홍도는 그림으로 그렇게 큰 돈을 벌었어도,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는 데에는 좀처럼 흥미가 없었던 듯합니다. 돈을 받아도 며칠 새에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탕진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으니까요.

더군다나 그에게는 돈에 뜻을 두지 않는 예술가로서의 남다른 긍지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선금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기로 약속해도 며칠이 지나도록 그림이 완성되지 않아 찾아가면, ”그림이 어찌 억지로 됩니까? 나는 내 흥을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태평하게 웃으며 대답하기 일쑤였습니다.

이처럼 호탕한 김홍도의 면모에 대해서는 ”작은 일에 구속됨이 없으니 신선 같은 사람“이라는 호평도 존재했지만, 가족들에게는 어디까지나 생계에 무심한 아버지일 뿐이었습니다. 오십이 넘은 김홍도가 하루가 다르게 건강이 나빠지자, 돈이 없어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해집니다. 실제로 김홍도의 외아들이었던 김양기의 친구 조희룡은 ”집이 가난하여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람처럼 사라지다(P)

흘러가는 대로, 마치 바람 같은 생을 살았던 천재 화가 김홍도. 오랜 세월에 거쳐 빛나는 명성을 쌓았음에도, 말년에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무수한 그림들이 우리 곁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김홍도의 삶을 짧게나마 돌아보았습니다. 화원 집안 출신이 아니었는데도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여러 인물과 연을 맺으며 명성을 쌓은 김홍도(E), 어떠한 소재라도 본인만의 스타일로 화폭 속에 담아낸 천재 화가 김홍도(N), 성공한 예술가로 조선 팔도에 이름을 드날렸으나 가족의 생계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김홍도(T),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결국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김홍도(P).

이러한 이유로 김홍도의 MBTI는 ENTP(엔팁)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대표 이미지는 챗GPT에 제 글을 보내주고 생성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