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만을 기다린 쓸쓸한 명장, 이순신의 MBTI는 무엇일까?
작성자 초희
MBTI로 보는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
죽음만을 기다린 쓸쓸한 명장, 이순신의 MBTI는 무엇일까?
한반도 남쪽 끝, 경상남도 통영에서 한산도로 떠나는 배는 매 정시마다 있습니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조용하고 잔잔한 바다를 가로지르다 보면 이 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상념에 빠지기도 합니다. 바다와 햇빛이 만들어내는 윤슬을 넋 놓고 바라보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바다를 따라 난 길을 걸어 들어가면 제승당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승리를 만드는 곳'이라는 뜻의 제승당은 이순신이 동료, 부하, 장수들과 함께 전투 작전을 논의하던 곳이었습니다.
제승당 우측에는 먼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수루가 있습니다. 수루 안에는 이순신이 남긴 시가 있지요.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일본군이 부르는 노래)는 남의 애를 끊나니.
- 한산도가
깊은 밤, 홀로 수루에 앉아 고민에 빠진 이순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이순신, 그 이름 세 글자는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며 훤히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아생전 끝도 없이 피로 얼룩진 전투에 나가야만 했던 이순신 본인은 스스로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어려운 집안에서 뚝심 있는 무인으로 성장하다(I)
이순신은 서울 건천동, 오늘날 을지로 3가 역 근처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이순신, 그 유명세 때문에 이순신의 집안은 대대로 무인 집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이순신의 조상들은 모두 명망 높은 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백록이 억울한 일로 곤장을 맞고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이순신의 집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지요.
이후 이순신 가족은 충남 아산으로 이사했습니다.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슬픈 과거를 뒤로 한 채, 과거 시험에 매진하고자 했지만 쉽지 않았지요. 어쩔 수 없이 이정은 아들들에게 희망을 걸어 봅니다. 아들들의 이름을 중국의 태평성대를 이끌었다고 전해지는 황제들의 묘호로 지었지요. 이희신, 이요신, 이순신, 이우신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 이순신은 문과보다는 무과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순신의 고향 친구이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오늘날로 치면 국무총리의 자리를 지낸 유성룡은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순신은 21살이 되는 해에 붓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이순신은 한 번의 쓰라린 낙방을 경험한 후 32세에 비로소 바라고 바라던 무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이순신의 앙숙으로 유명한 원균이 27세 때 무과에 합격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늦은 감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순신의 딱딱하고 올곧은 성품은 그 늦은 관직 생활마저 순탄치 못하게 했습니다.
이순신은 청렴결백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상사가 부정을 저지르면, 사사건건 옳고 그름을 따져 물어 결코 넘어가지 않았지요. 결국 이순신은 여러 상사에게 미움을 얻어 더 낮은 품계에서 벼슬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전라좌도 수군의 대장이 되어 거북선을 시험하다(S)
1590년, 조선 사회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올 수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조선과 꾸준히 교류해 오던 대마도는 조선 정부에 적극적으로 전쟁의 가능성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왜구를 무찌른 신궁이 세운 나라답지 않게 오랜 세월 평화가 지속되면서 조선의 국방 상태도 날로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군대의 의무마저 제대로 지지 않았지요.
그래도 소문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유능한 장수를 추천하라 명했습니다. 이순신이 벼슬 생활을 시작한 지도 어느덧 10여 년, 유성룡은 역량에 비해 늘 낮은 관직을 전전하던 이순신을 수군의 대장으로 추천했습니다. 이순신의 나이 47세의 일이었습니다. '좌도'는 남향으로 앉은 임금의 왼편이라는 뜻으로 한반도 지도를 정면으로 바라 보았을 때 전라도의 우측 지방을 말합니다.
수군을 이끌게 된 이순신은 전쟁에 대한 소문이 어떠하든 자신이 맡는 직무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습니다. 군영에 식량과 무기를 두둑이 준비해 두는 것은 물론, 조선 수군의 전투함인 판옥선을 다시 설계하고 만들었지요. 이 시기 판옥선에 지붕을 씌운 형태인 거북선도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만든 배를 타고 나가 훈련을 빼먹지 않았던 이순신이 거북선에 설치한 대포를 시험한 날은 놀랍게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딱 보름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렵게 얻은 수군이 전멸하다(F)
1592년 4월, 대규모의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임진왜란, 길고 긴 7년 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북쪽으로 올라오는 일본군 앞에 조선은 무력했습니다. 여러 차례 북방의 여진족을 무찌른 베테랑 장수 신립마저도 일본군에 대패했습니다.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 길을 떠났고, 의주에서는 명나라로 망명할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혼란과 절망 속에서 조선 정부에 첫 승전보를 알린 건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었습니다. 선조는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그 뒤로 이순신이 써내린 승전의 서사를 요목조목 뜯어보기에는 진부할 정도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탁월한 전략과 전술을 펼친 명장 이순신의 면모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순신이 남쪽 바다를 꽉 틀어쥐고 있었기에 북쪽으로 올라간 일본군은 발만 동동 구르게 되었습니다. 서해를 거쳐 식량을 운반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을 도우려 참전한 명군이 일본군과 휴전 협상을 시작합니다. 명군은 사실 남의 나라 전쟁에서 많은 피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명군은 일본군과 협상을 벌이는 동안 조선군이 일본군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나라 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원수를 눈 앞에 두고도 조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요.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에게 일본군이 남해안으로 철수하여 머무르고 있던 왜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바다에서 성을 공격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순신은 그 명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당시 수군 사이에서는 전염병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길어진 전쟁 탓에 청결하지 못한 환경에 오래 노출된 수군은 적군의 총과 칼이 아닌 병마 앞에 무수히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순신도 병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병에 시름하면서도 수군의 병력을 메우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애써 충당한 병력마저 허무하게 잃고 말았습니다. 이순신 대신 수군의 대장에 오른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이 전멸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거북선은 전멸했고, 판옥선도 단 13척만 남은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백성을 생각하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다시 명량에서, 또 노량에서(J)
선조는 왜 이순신의 벼슬을 빼앗은 걸까요? 사실 선조는 꽤 오래 전부터 이순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난 뒤 임금의 권위는 땅으로 떨어져만 가는데 전투마다 승리하며 백성에게 큰 인기를 얻은 이순신이 달갑지만은 않았던 것이지요. 이순신이 혹여 아무런 힘도 없는 임금에게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까, 선조는 늘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명과 일본 사이에서 벌어진 휴전 협상이 3년 만에 아무런 성과없이 끝이 났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남쪽 땅을 정벌한다는 목표로 다시 쳐들어왔고, 선조는 일본군 측의 첩보를 듣고는 이순신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지요. 그러나 이순신은 그 명령을 어겼습니다. 혹여나 일본군이 잔꾀를 부린 거라면, 수군이 큰 피해를 볼 게 뻔한 일이었으니까요. 선조는 격노했습니다. 결국 이순신은 한성으로 잡혀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수군은 전멸했지요. 자신을 믿어 주지 않고 결국 제 동료와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 몬 임금이, 이순신은 얼마나 미웠을까요?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마음을 짊어진 채 남쪽으로 내려온 이순신은 다시 수군 병력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백성은 이순신이 지나는 길마다 나와보며 응원을 보탰지요. 하지만 비극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부고에 이어 막내 아들의 부고를 접한 것이지요. 이순신은 깊은 슬픔 속에 한 번 더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3척 대 133척, 명량해전의 기적은 이처럼 엄혹한 현실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저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라는 이순신의 한탄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지치고 지친 마음을 어떻게든 어르고 달래야만 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전을 남겨 놓고 있었으니까요.
조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나면서 전쟁 상황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전쟁을 이어갈 목표를 잃은 일본군은 모두 철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가만두고 지켜볼 이순신이 아니었지요. 긴 전쟁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무수한 백성의 원혼을 생각했던 걸까요. 이순신은 끝까지 철수하는 일본군의 꽁무니를 좇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노량에서 벌어진 이 마지막 전투의 결말을 압니다. 치열하게 싸우던 이순신은 갑작스레 날아든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수군이 이겼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 사실이 과장된 것은 아닌지 다시 물었습니다. 여전히 이순신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지요.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이순신이 죽지 않고 살았다면, 향후 선조와 이순신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반면에 수많은 백성은 충남 아산까지 이어진 이순신의 장례 행렬에 구름같이 몰려들어 '마치 제 부모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슬퍼했습니다. 그렇게 기나긴 전쟁도, 이순신의 고통스러운 삶도 끝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한산도 제승당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짧게나마 이순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지만 스스로의 신념을 뚝심 있게 지켜가며 조용히 주어진 삶을 살아낸 이순신(I),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던 이순신(S), 개인의 삶은 비극으로 얼룩졌지만, 동료와 부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난 이순신(F), 철두철미한 계획과 대비로 매 전투마다 승리를 거둔 이순신(J).
이러한 사실들을 미루어 보아 이순신의 MBTI는 잇프제(ISFJ)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 대표이미지는 챗 GPT에 제 글을 주고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여전히 고증 면에서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재미로 봐 주세요 :)
제가 알기로 한국인 중에 잇프제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하는데, 신기하네요 ㅎㅎ